[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벽장 속에서 태극기 만든 통영의 김응수 이윤옥 벽장 문 걸어 닫고 호롱불 밝혀 만든 태극기 이로써 빼앗긴 조국을 찾을 수만 있다면 밤샌들 못 새우며 목숨인들 아까우랴 열여덟 꽃다운 처녀 숨죽여 만든 국기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목청껏 부른 대한독립만세 함성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요 죄질은 악질이라 차디찬 감옥소 시멘트 날바닥에 옷 벗기고 콩밥으로 주린 배 쥐게 해도 단한 번 꺾이지 않던 그 당당함 그대는 정녕 일신의 딸, 조선 독립의 화신이었소. ▲ 김응수 애국지사(왼쪽)와 1919년 무렵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수놓은 밥상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1,2,3권에 있습니다. 김응수(金應守, 1901. 1.21 ~ 1979. 8.18)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김응수 애국지사는 1919년 3월 11일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이들의 만세운동을 기록한 일본 쪽 자료의 따르면 부산진 소재 기독교 경영 일신여학교 한국인 여교사 임말이 외 학생 1명을 취조한바 이 학교 교장인 캐나다인
[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시가현(滋賀)은 교토와 오사카에 면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곳은 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55건의 국보 그리고 806건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국보보유로 치면 교토부, 도쿄도, 나라현, 오사카부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에도시대에는 강남, 강서, 강동 지역으로 나누던 것을 명치시대 이후에는 비파호를 중심으로 호남, 호동, 호북, 호서 4곳으로 생활권역을 구분하고 있다. 예부터 시가현은 관동지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특히 가을철 단풍의 명소로 꼽혀 단풍철에는 숙박을 정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이에 맞춰 호동3산 순례라든가 호남3산 순례와 같은 유서 깊은 절 순례코스를 만들어 놓고 임시버스를 운행하는 등 지역 관관협회의 홍보도 매우 적극적이다. ▲ 고구려 혜자 스님도이곳의 단풍에매료 되었을 듯! 백제사는 호동3산(湖東3山)속하는 절로 단풍철에만 임시 운행하는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지만 일정에 따라 바삐 움직이는 것이 싫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찾아 나섰다. 역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그의 이름을 가리고 겨레의 교육을 말하지 마라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덮고 애국을 논하지 마라 거칠고 마른 들판에 천포간이학교 세워 양정원 세워 잠자는 조선의 넋을 일깨우신 임 신사참배 창씨개명 황국신민 거부하며 온 몸으로 일제에 맞서 지켜낸 조국 두 개로 쪼개짐에 비통해 하던 임 어이타 예재 고갯길서 그 푸른 뜻 꺾였는가 흘러가는 흰 구름아 너는 알겠지 학산이 지켜낸 겨레사랑 마음을! 뭇 산새들아 너희는 알겠지 학산의 못다 이룬 꿈을! -겨레의 참 교육자 학산 선생을 기리며, 이윤옥 시 학산 윤윤기(1900-1950)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그의 따님 윤종순 여사님을 알게 되고 부터다. 몇 해 전 한 행사에서 학산 선생을 빼닮은 윤 여사님을 뵙고 명함을 드리고 헤어졌는데 곧바로 손수 쓴 편지와 책 한권을 보내 오셨다.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 한길사》가 그 책이다. 기자는 단숨에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 한길사 책 표지/학산 선생의 보초병을 생각하며 한시 책장을 덮으며 충격적인 것은 학산 선생이 6.25 한국전쟁 시에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학산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흔히 일본가나 글자를 공부할 때 오십음도(五十音, 고쥬온즈)를 그려 넣은 직사각형의 글자표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가로 5글자 세로 10줄이니까 50개 글자인 셈이다. 물론 이 가운데는 현대 일본어 글자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있어서 50개가 되지 않지만 편의상 지금도 50음도라 부른다. 문제는 일본 글자가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두 종류가 있어서 모두 100개나 익혀야 하는 데 있다. 보통 히라가나는 일반적인 문장을 쓸 때 쓰며 카타카나는 외래어나 의성어 의태어 그리고 전보문 따위에 쓴다. 글자 숫자도 많지만 문제는 이렇게 글자 수가 많은데도 다양한 표현이 안 된다. 예컨대 한국어에서는 외래어 발음 가운데 쉘부르, 섀도우, 쇄뜨기, 미셸, 셀프, 샐러드에서 보듯이 다양한 모음과 복모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어에서는 쉘, 섀, 쇄, 셸, 셀, 샐을 각각 발음 할 수 없는 모음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겨우 셀 하나로만 발음이 가능하다. 거기다가 받침에 해당하는 발음이 안 되다 보니, 맥도널드는 마그도나르도, 보일러는 보이라, 로켓은 로케토 같은 식이다. 그래서 일본인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를 할 때 글쓴이는 종종 영어발음을 시켜보고 놀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기록상으로 보면 권기옥은 1925년 2월 28일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20일 중화민국 본부에서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을 받았고, 박경원은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1927년 1월 28일에 딴 것으로 나온다. 이 두 기록만 봐도 권기옥이 박경원 보다 앞선다. 그런데 왜 박경원을 두고 최초 여류 비행사라고 하는가 살펴보니 비행사자격에 문제를 두었기 때문이다. 권기옥은 공군에서 비행사자격증을 땄을 뿐 민간 자격증은 없다. 그러나 박경원은 민간인으로 일본 정부가 공인한 자격증을 받았던 것이다. 어쨌든 최초로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권기옥이다. 나라를 일제에 강탈당한 상태에서 자신의 국가에서 비행사 자격을 딸 수 없어 해외로 나가 딴 비행사 자격증을 두고 중화민국 본부 항공처에서 발행한 비행사 자격증은 자격증이 아니고 일본에서 딴 비행사 자격증만 비행사 자격증으로 인정하여 박경원이 최초 비행사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당시 신문 자료를 살펴보면, 권기옥과 박경원을 똑같이 여류 비행사라고 불렀다. 1926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中國 蒼空에 朝鮮의 鵬翼- 中에도 女流飛行家라는 제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항공학교에 다니던 그는 매우 영특했는데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1925년 2월 28일 드디어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그 뒤 유시천 교장의 부탁으로 후배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며 견습비행을 한다. 그러나 막상 권기옥을 비롯한 비행사들이 활동할 무대가 없었다. 1925년 5월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서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테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말했지만 임시정부의 재정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고 그해 1925년 가을 광동의 국민혁명정부에서 가담했다. 그 뒤 1926년 봄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馮玉祥軍)의 항공대에 들어갔다. 1926년 4월 권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다. 그 무렵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인 서왈보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시인 이상화의 형)을 만나게 되고 훗날 그와 결혼하여 함께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27년 장개석총통이 북벌(北伐)할 때, 동로 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가담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나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는 굳은 의지로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권기옥(權基玉,1901.1.11~1988.4.19) 애국지사는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당찬 여장부다.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平安南道 平壤府 上水口里) 152번지에서 아버지 권돈각(權敦珏)과 어머니 장문명(張文明)의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은 기옥이 아니라 갈례라고 불렀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아버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서 가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집안이 어려워 11살 되던 해 은단공장에 다니면서 집안 살림을 돕던 권기옥은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 교회(章臺峴敎會, 1894)에서 운영하던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숭현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기독교 계통 학교인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졸업반이던 그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가담하게 되는데 숭의여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박현숙 선생의 영향을 받아 항일 비밀결사인 송죽회에 참가해 활동했다. 그는 스승 박현숙을 통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신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오늘은 한글이 태어난 지 567돌을 맞는 날이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글자인 가나(仮名)는 언제 생겨났을까?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한글보다 훨씬 이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충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 공문서에서 오늘날 글자와 같은 형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가나(仮名) 탄생을 나라시대로 잡기도 하는데 그러나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재미난 것은 글쓴이가 대학에서 일본어를 처음 접하던 37년전 만 해도 일본의 가나(仮名)는 10세기에서 12세기에 생겨난 글자라고 배웠는데 오늘 이글을 쓰려고 '가나의 역사'를 찾아보니 일본 위키피디어에서는 이보다 훨씬 앞선 나라시대로 잡고 있다. 여기서는 2세기 곧 200년이나 앞서 생긴 글자라고 쓰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또 언제 가나(仮名)의 역사가 바뀔지 모르겠다. ▲ 기노츠라유끼(紀貫之)의 토사일기로 서기 935년 무렵의 가나글자다. 만든 이와 창제, 반포일이 확실하지 않기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 가나의 최초 모습이라고 들고 있는 것은 정창원(正倉院) 소장의 공문서이다. 여기에서는 다(多)라는 한자를 현재 일본글자인 다(夕)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김학철 선생 김학철 선생님! 선생님은 미음 한모금도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가슴 찡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 보다 앞서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친필 유서를 남기시면서 주사도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목숨이 경각인 지경에 이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조선의용군 출신답게 선생님은 병원 주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올해는 서기 2013년이고 단기로는 4346년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단기만 쓰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사이 서기에게 자리를 내주고 단기(檀紀) 표기는 개천절 하루만 쓰는 것 같아 씁쓸하다. 뜻이 있는 겨레라면 달력에 나란히 써놓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 마저도 팽개친 지 오래다. 비록 행사이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10월 3일 개천절을 맞아 각 곳에서 뜻 깊은 개천절 행사가 이어져 다행이다 싶었다. 기자는 밤 10시 쯤 YTN뉴스에서 개천절 행사 소식을 보았는데 비교적 상세히 행사 내용을 소개했고 행사 참가자들의 인터뷰도 많이 넣어 보기 좋았다. ▲ 단기 제4345주년 개천절 경축식 열려라는 YTN뉴스 자막 갈무리 문제는 자막이었다. 올해가 단기 4346년인데 자막은 계속 단기 제4345년주년 개천절 경축식 열려로 나오는 것이었다. 자막이 애초부터 제4345주년 개천절 경축식이라고 했으면 몰라도 단기를 붙인 이상 단기 제4345주년이란 말은 맞지 않아 뉴스제보 부서로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이 받았다. 밤 10시 21분이었다. 대충 단기표기에 관한 자막표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서기 2013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