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일본의 가게나 식당 입구에는 노렌(暖簾, のれん)이라는 헝겊으로 된 발을 걸어두는 풍습이 있다. 노렌에는 기업 이름, 가게 이름, 가문(家紋, 집안 무늬) 따위를 새겨두는 데 원래 이것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또는 직사광선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문을 열어두었을 때 가게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가게 입구에 늘어뜨린 발과 같은 구실로 쓰기시작 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전후에는 밥집이나 포장마차 등에서 손님이 나가면서 이 헝겊에 손을 닦고 나가기도 했는데 노렌이 더러울수록 번성하는 가게라는 인상을 손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식당이나 가게 등에 걸린 노렌은 영업중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노렌이 걸렸으면 영업중이요, 노렌이 없으면 영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 여러가지 노렌이 걸린 일본의 가게들 이러한 손님과 무언의 신호장치인 노렌문화가 한국에는 없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바쁜 점심을 마치고 저녁 영업사이에 잠시 쉬고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미안한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 종업원들이 고된 식당일에 잠시 쉬는 달콤한 휴식시간을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일본 교토에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전북 남원 일대에서 무고한 백성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현재 일본인들은 귀무덤이라 부른다. 에도시대의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말이 잔인해서 귀무덤이라 부르자 했다는데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덤 이름부터 왜곡되어 있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일본인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그러한 현실은 경남 사천에 가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곳에는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달랑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건만 역사는 왜곡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9월 26일은 남원 만인의총에서 호국정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교토 코무덤의 진실을 파헤친다. -편집자주- 귀면 어떻고 코면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우리가 여기서 불식시켜야 하는 까닭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코를 묻었는데 귀를 묻었다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잔학성의 상징인 코베기를 완화된 표현으로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첫해는 이런 식으로 그럭저럭 지나가고 이듬해는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고 기대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는커녕 기근에다가 전염병까지 번져 더욱 비참해지고 결국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굶주려 지쳐서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절박한 상황에 빠지니 비유하자면 왕생요집에 적혀 있는 메말라 가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물고기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중략) 시체 썩는 냄새가 교토 시내에 가득하였고 썩어가는 시신의 모습을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었다. 교토 시내가 이런 지경이었으니 하물며 가모가와 가장자리의 들판에는 온통 시체가 뒹굴고 있어 수레가 지나갈 틈도 없을 정도였다. 이는 천년 고도 일본 교토의 800여 년 전 모습으로 때는 서기 1205년! 50살의 나이로 출가한 가모노쵸메이(鴨長明, 1155-1216)가 58살에 지은 《호죠키(方丈記)》에 나오는 글이다.《호죠키(方丈記)》는 세이쇼나곤의《마쿠라노소우시(枕草子)》, 요시다겐코의《즈레즈레구사(徒然草)》와 함께 일본 고전문학의 3대 수필집의 하나로 인생무상을 읊은 수준 높은 작품이다. ▲ 가모노쵸메이 모습(왼쪽), 가모노쵸메이와 관련이 깊은 교토 시모가모신사 지금 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 교토에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 남원 일대에서 무고한 백성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현재 일본인들은 귀무덤이라 부른다.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말이 잔인해서 귀무덤이라 부르자 했다는데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덤 이름부터 왜곡되어 있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일본인들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그러한 현실은 경남 사천에 가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곳에는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를 달랑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건만 역사는 왜곡 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9월 26일은 남원 만인의총(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순절한 민.관.군 만인의사를 합장한 무덤)에서 호국정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이날을 맞아 교토 코무덤의 진실을 파헤친다. -편집자주- 돌 치워라 돌 치워라 봉분 위 돌 치워라 먼 고향 남원땅 엄니 곁에 나 가리라 왜놈 칼 맞고 코 잘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보통 “스카이라이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케세이선(京成線)은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 많이 이용하는 열차로 종점은 우에노(上野)역이다. 시내 순환선 JR 우에노역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면 바로 정면에 나리타행 케세이선을 알리는 큼지막한 파란 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을 왼쪽에 두고 십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에노공원에 이른다. 1월 21일 목요일 우에노공원을 찾아간 날은 초봄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시각은 채 10시가 되기 전인데도 산책하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 엄마의 모습이 눈에 띈다. ▲ 도쿄 우에노공원 안에 안내판도 없이 외롭게 서 있는 왕인박사기념비 비 앞에는 매화나무를 기린다는 일본시인의 시구를 적은 팻말이 어울리지 않게 서 있다.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이라 불리는 이곳은 1874년 명치 정부 때 세운 일본 최초의 공원이다. 온시공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궁내청 소속의 땅을 도쿄시에 하사(恩賜, 온시는일본 발음)한데서 유래한다. 공원 내에는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유명한 동물원, 미술관은 물론이고 교토 청수사를 본떠 만들었다는 청수관음당과 몇 개의 신사, 명치유신의 지도자 사이고다카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안동의 오지 초미니 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이번 졸업식을 갖게 되는 길안초등학교는 80여년의 역사 깊은 학교로 6,63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도시화에 밀려 이농현상으로 이번 졸업식엔 총 10명(본교 6명, 분교 4명)으로 초미니 학교 졸업식이다. 지난해의 경우 경상북도와 한국수자원공사 공동으로 오지초등학교 영어체험 학습지원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수자원공사 주관으로 개최한 전국 영어스피치대회에서 장려상(김민재) 수상한바 있고, 올해는 경북오지초등 영어스피치대회에서 장려상(손진산)을 수상하였으며, 다수 학생들이 영어로 지역 관광안내 등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 어느 도시지역 학생들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 -안동뉴스- 졸업생이 전부 10명이라면 정말 미니 중의 미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초미니학교라고 부른다. 얼마나 오지(奧地) 이기에 전교생이 본교, 분교 합해서 10명일까? 교육의 도시 집중화를 여지없이 말해주는 오지학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당 교육청에서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영어스피치대회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등 말이다. 오지체험이란 말로 많이 알려진 오지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니, 오지(奧地) : 해안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인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는 10월 31일(목)까지 한국이민사박물관 개관 5주년을 맞이하여 자이니치(在日)학교들-재일한인 민족 교육 특별전을 열고 있다. 현재 50만 명에 달하는 재일 한인 사회는 일제 강점기 경제 수탈에 의한 이민자들과 강제 징병․징용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 자이니치(在日) 학교들 홍보전단 해방이 되자 재일 한인들은 그 동안 일본식교육을 받아왔던 자녀들에게 조국의 말과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하지만 식민지 본국이었던 일본에서의 민족 교육은 순탄치 않았다. 해방을 맞이하였음에도 재일 한인들은 자주 국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도 우리 민족의 말과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것이다. 재일 한인 민족교육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적인 정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재일 한인들은 민족 학교와 민족 학급, 한글 학교 등 다양한 모습으로 자녀들에 대한 민족 교육을 이어오고 있다. ▲ 전시실 내부 이번 전시에서는 일본 현지 자료 조사를 통해 수집된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 정지용 시인 정지용도 그날 우리가 걸었던 가모가와(鴨川) 강변에 있었을까? 그곳에서 쓰라린 조국을 보았고 그리운 고국의 보금자리를 그리워했을까? 어쩜 고향집 처마 밑 제비조차도 그리워했을 시인이다. 가모가와 십리 벌에 긴 해가 드리울 무렵 남의 나라 그것도 고국을 강탈한 일본 땅에 홀로 남은 조선 청년은 얼마나 서러웠을까? 오죽하면 오렌지 껍질 씹는 나그네의 시름일까? 동지사(同志社,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윤동주 시비 옆에는 향수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근한 시인 정지용의 시비도 있다. 정지용 시비는 윤동주보다 10년 늦은 2005년 12월 18일에 세워졌다. 월북작가라 해서 한동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정지용은 그의 시 향수를 노래한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한국은 오늘부터 한가위 연휴에 들어간다. 올해는 한가위가 목요일에 들어있는 관계로 앞뒤로 해서 5일의 연휴이다 보니 고향길 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울 듯싶다. 설과 한가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인에게 있어 크나큰 명절이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한가위 풍습은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도 우리의 한가위에 해당하는 오봉(お盆, 우리의 추석)이라는 날이 있긴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오봉을 양력으로 지낸다는 것이다. 일본은 명치정부(1868년)이후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한가위도 양력으로 지낸다. 둥그런 보름달과 무관한 한여름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양력 8월 15일이 이름하여 오봉(お盆)인 것이다. ▲ 마을 사람들이 모여 봉오도리를 춘다. 원래 오봉은 일본력(和暦)으로 음력 7월 15일에 조상신을 모시는 행사였다. 더러는 이를 불교행사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고신도(古神道)에서 행하던 조상공양 의식이 불교의 우란분(盂蘭盆)과 더해져서 오늘날의 오봉(お盆)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조상공양의 풍습이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오봉을 지내는 풍습은 지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별과 바람과 하늘의 시인 윤동주.그가 숨지기 전까지 다니던 동지사(同志社,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今出川) 교정을 찾은 것은 매미소리가 우렁차던 7월 중순이었다. 사랑하는 조국을 삼켜버린 나라 일본. 그 일본의 엘리트들이 다니던 동지사대학 한켠에서 그는 매일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시를 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교토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교토의 하고 많은 대학 중에 한국인인 우리가 이 대학이 반갑고 정겨운 것은 윤동주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색하며 거닐었을 교정 안에 세워진 시비(詩碑)를 찾아 정문 수위실 에 이르러 한국말로 “윤동주”라고만 해도 눈치 빠른 수위 아저씨는 동지사 교정 안내서를 꺼내 친절히 빨간 펜으로 시비 위치를 가르쳐준다. 10여 년 전만 해도 수위 아저씨에게 손짓 발짓으로 윤동주시비를 물어야 했던 것에 견주면 수위아저씨 마저도 윤동주 팬이 된 것 같다며 이곳을 10여 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