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오늘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날의 대지진을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関東大震災)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날을 조선인 관동대학살의 날로 기억한다. ▲ 조선인이 방화를 일삼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오사카신문 호외.1923.9.3 90년이 지난 지금 왜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간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 사망자 수는 6천여명으로추정된다. 하지만문헌에 따라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정확한 숫자 파악이 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효숙 원광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2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90년을 맞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에서 당시 학살된 조선인 수는 공식 기록보다 3.4배나 많은 2만 3,058명에 이른다는 독일 외무성의 사료를 들어 밝혔다. 뿐만 아니라 도쿄대공습 때 희생된 조선인 수도 41,000여 명에 이르는 등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으로 희생당한 조선인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다. 이들 희생자들 중 일부는 여름철 불꽃놀이로 유명한 스미다가와구 요코즈나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뭔가 뜻밖의 일에 너무 놀랄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아연실색하다'와 '아연질색하다'라는 표현이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 중에서 맞는 표현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다'입니다. '아연실색'은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란다는 것으로, 여기서 '실색'이란 말의 '실(失)'은 잃어버린다는 뜻이고, '색(色)'은 얼굴빛을 뜻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을 '아연질색하다'라고 하는 분들이 상당히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 또는 일을 몹시 싫어할 때 'OO는 질색(窒塞)이야.' 이렇게 말할 때가 있는데, 아마도 이것을 연상해서 '아연질색'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월간 교육평론- 아연실색의 예문을 찾다보니 아연실색이냐 아연질색이냐를 놓고 설명하는 글은 있어도 아연실색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 :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람. 크게 놀람으로 순화하라.고만 할 뿐 순화해야 할 까닭을 밝히지 않는다. 무슨 곡절이 있는 말일까? 혹시 일본말이라서? 그렇다. 관보 제13,269호(96.3.23)에 보면 일본말로 규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조선 정부가 주려고 하지 않는 대장경을 자기들이 손수 만들면 되지 무엇 때문에 구걸한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은 입만 열면 일본불교의 우수성을 입증하려고 안달을 해오고 있다. 국보1호인 광륭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만 해도 신라에서 건너 간 불상임이 여러 문헌에 의해 입증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일부 학자는 일본사람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이다. 538년 백제의 성명왕 때 불교를 전해준 이래 불상과 수천 종의 불교경전은 물론이고 뛰어난 승려들이 건너가 사천왕사니 법륭사니 하는 절을 지었음에도 절의 안내서에는 이런 사실(史實)을 적어주지 않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스스로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불교문화에 앞장 선 나라라면 왜 대장경을 만들지 못했을까? 의문스럽다. ▲ 조선왕조실록 성종 16년 9월 16일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팔십만 대장경이라도 만들 일이지 구차하게 조선정부에 와서 단식투쟁을 하면서까지 고려대장경을 얻어 가려고 한 것을 보면 15세기까지도 일본불교 수준이 높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대장경 판인데 전하(세종)께서 주신 것은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되었나 / 달 밝은 밤이 되면 홀로 피어 /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 그 이름 달맞이꽃 / 아~아~아~ / 서산에 달임도 기울어 / 새파란 달빛아래 애처롭구나 위는 가수 이용복이 불렀던 달맞이꽃이란 노래로 김종호가 노랫말을 지었다. 한때 유행했던 이 노래는 지금도 달맞이꽃이 피는 이맘때면 귓전을 맴돈다. 남아메리카 칠레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에서 귀화식물로 자라는 이 꽃은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오므라들었다가 밤이 되면 활짝 벌어지기 때문에 밤에 달을 맞이하는 꽃이라고 해서 '달맞이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재미난 것은 이 꽃이름이다. 일본말로는 츠키미소(月見草)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달을 본다는 뜻이다. 달을 보는 것과 우리말의 달을 맞이한다라는 것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느낌은 완전 다르다. 문학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달을 맞이한다는 것이 생명력이 있어 보인다. 달을 맞이한다는 것은 대상인 달을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임을 맞이하는 것이든 떠나 버린 임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든 달맞이에서 느끼는 정서는 임마중의 의미다. 꽃이름이 나왔으니 봄의 벚꽃놀이도 일본말과 우리말은 차이를 보인다.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경장(經藏, 대장경을 모셔 두는 전각)에는 원래 하나만 수장(收藏)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 증상사에는 송판(宋版), 원판(元版), 고려판(高麗版) 대장경을 모셔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도쿄 증상사(增上寺)에서 특별히 받은 경장안내에는 이런 설명이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진기한 보물을 그것도 3개씩이나 모셔두고 있다니 대단한 절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일본말로 죠죠지(增上寺)라 부르는 증상사는 도쿄 한복판에 있다. 도쿄의 상징으로 일컫는 도쿄타워 바로 밑에 우리의 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증상사를 찾은 날도 고려대장경이 이곳에 모셔진 것을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증상사 본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한국말을 나누는 우리 일행에게 성균관대학의 철학과 3학년이라는 남학생이 다가와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도쿄 증상사 본당(대웅전) 많이 둘러보았느냐. 도쿄에서 며칠 째냐?...등등 낯선 땅에서 동포를 만나는 일은 혈육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반갑다. 군대를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올해 68주년 광복을 맞아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답사 마지막 코스인 도쿄 야스쿠니신사(이하 야스쿠니)로 가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부른 광복의 노래 강원신 이윤옥 제물포항의 긴 뱃 고동소리 형제자매 잠든 고향산천 뒤로하고 떠나가던 날 오뉴월 뜨거운 태양은 갑판 위로 녹아내리고 알몸뚱이 홀로 버려진 사탕수수밭 가죽채찍 맞으며 받아든 피멍든 동전 모아 조국의 독립에 기꺼이 보내노라 다시 태어나도 조국을 위해서라면 떠나올 수 있으리 다시 태어나도 광복을 위해서라면 하와이 사탕수수밭 그 검은 태양을 견뎌내리라. 강원신(康元信, 1887 ~ 1977) 평남 평양(平壤)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905년 5월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하였다. 하와이 도착 뒤, 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 사탕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며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하였으며, 1913년 무렵 남편이 미국 본토 시카고로 건너가 법학박사과정을 밟게 됨에 따라 시누이 강혜원(康蕙園)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포도농장에서 시간당 15센트의 노임을 받으며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면서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강원신 애국지사의 자세한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 참조 ** 이 윤 옥 시인 : 시집으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광에서,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군수공장에서 힘겨운 노역을 하던 한국인들은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아 꿈에도 그리던 고국행 배에 올랐다. 한국인 7,000여 명은 해방되던 1945년 8월 22일 우키시마호(浮島丸)를 타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돌연 이 배는 교토 앞바다 마이즈루항으로 기항을 시도했고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20분 ‘우키시마호’는 폭침되고 말았다. 고향땅을 밟기도 전에 승선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실로 참혹한 사건이지만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 추모제날 살풀이 춤 (주일한국교육원제공) 당시 승선자 7,000여 명 중 4,000여 명이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 수장 된 지 올해로 68년을 맞이한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우키시마호의 도리우미 함장은 사건전모를 발표하고 조선인 3,735명 중 524명과 일본인 25명을 합해 총 54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승선장부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측의 이런 숫자는 무의미한 것으로 아직 이 사건의 정확한 전모는 알 수 없다고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관동 최고(最古)의 절인 센소지는 한반도계 출신인 히노구마 형제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들이 바다에서 건진 금동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 센소지이며 아사쿠사 신사는 이들 어부 형제와 마을 원로 하지 씨를 모신 사당이다. 또한 센소(浅草)라는 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당시 푸른 초원 지대로 말을 기르던 곳이다. 목장을 경영하며 경제권을 장악하여 야마토정부의 관동개발 프로젝트를 완성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반도 출신자들로 그들은 오늘의 관동지방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이기도하다. 이곳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참고로 이 글은 2010년 1월에 답사를 마치고 쓴 글이다. 아사쿠사 센소지는 신도들에게 관세음신앙의 명소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뭐니뭐니해도 나카미세(절 입구에 즐비한 상점)의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가미나리몽을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상점가는 다양한 일본 전통인형은 물론이고 직접 구워 파는 전통과자와 모찌 등의 먹거리와 핸드백을 비롯한 여성들의 소품 액세서리, 옷, 신발, 기모노를 만들 수 있는 옷감류 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거기에 뒷골목에는 식당들도 즐비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러한 나카미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아사쿠사는 옛도시의 분위기를 간직한 유서깊은 절이 있는 도쿄에서 가장 전통적인 거리 입니다. 수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아사쿠사간논절(浅草觀音)과 아사쿠사신사(浅草神社)는 물론 주변 지역에까지 아사쿠사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사쿠사에서는 에도시대 서민 경제와 오락의 중심이었던 옛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현재 이 시대 서민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도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이토쿠(臺東區) 관광과에서 만든 <아사쿠사 일대와 센소지>에 대한 한국어판 안내문은 일본어를 몰라도 아사쿠사 일대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친절한 한글로 되어 있으며 아사쿠사 역 근처 여행안내소에서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를 도쿄의 인사동거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인지 인사동 골목의 아기자기한 상점가인지 헷갈리는 곳. 절 입구에 나란히 나있는 나카미세(仲見世, 상점가)는 언제나 관광객들로 바글거린다. 이곳이 관동 최고의 관세음신앙지 센소지(浅草寺)다. 센소지는 가장 오래된 절을 뜻하는 최고(最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절로도 최고(最高)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도쿄 시내를 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