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곧 다가올 68주년 광복을 앞두고 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200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몇 번이나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오늘날 일본에 고기식당으로 널리 알려진 야끼니꾸집(燒肉, 불고기집)의 등장을 일본 위키에서는 1960년대 전후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기를 구워먹고(고기구이), 삶아먹고(편육), 쪄먹고(갈비찜), 부쳐 먹고 (고기전), 제사상에 올리는(고기산적) 한국과 같은 요리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는 육식 금지령의 영향으로 피차별족이나 아이누족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포유동물인 고기를 먹는 습관은 없었다. 그러나 멧돼지를 약으로 먹거나 산간지방에 사는 일부 사람들이 수렵으로 잡은 동물을 종종 먹는 일은 있었다. 또한 에도시대까지는 토끼 고기를 흔히 먹었는데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 후기에는 모몬지야(ももんじ屋, 일종의 푸줏간)가 생겨 에도(오늘날 동경)와 같은 대도시에서 고기를 먹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먹게 된 것은 명치시대(明治時代, 1868-1912) 이후이다. 이는 일본 위키사전에 나온 일본인들의 육류섭취 역사의 일부이다. 명치 때부터 일반인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고 치면 약 145년 정도가 육류섭취의 역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식구들끼리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든가, 중요한 날에 빠지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곧 다가올 68주년 광복을 앞두고 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기타큐슈의 치쿠호(筑豊) 탄광일대를 둘러보고 난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한때 홍문관(弘文館) 동료 중에서 기준(奇遵)이 가장 젊었으나, 문학이 넉넉하여 그 명성이 조광조(趙光祖)에 버금갔다. 강개(慷慨)하여 일을 논하면 고려(顧慮)하는 바가 없었고, 늘 상(임금) 앞에서 언론을 격렬하게 하여 사람들의 귀를 용동(聳動)시켰으나 대신들은 흔히 그를 미워하였다. 이때 병으로 집에 있으면서 상소로 이성언(李誠彦)의 죄를 논하여 중벌에 처할 것을 청하고, 또 대간이 그 죄를 힘껏 청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하였다. - 중종실록 12년(1517) 10월 30일- 이는 스물다섯의 선비 복재 기준 (奇遵,14921521)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종 앞에서 이성언을 벌주라고 거침없이 말을 하던 복재 기준의 나이는 불과 25살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3년 전인 22살 되던 해에 그는 사마시험에 합격하여 24살에 홍문관에 임명된다. 이후 사화를 당하기까지 약 5년간 홍문관 박사, 수찬, 응교, 사헌부 당령 등 요직을 거치게 되는데 28살에는 경연시강관이 되어 임금에게 성리학의 핵심 서적인 근사록과 성리대전을 강론하지만 그것이 그의 화려한 정계 활동의 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승승장구하던 승진 때문이었을까? 아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곧 다가올 68주년 광복을 앞두고 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늦게 나타난 답사단 일행을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점 빼러 다닌다는 아줌마를 통해 얼굴 공사(?)를 했습니다. 아... 생각보다 아프더군요.. 납땜하는 거 같은 기계로 제 얼굴의 잡티를 하나하나 태워주셨는데 눈가와 이마는 다른 곳보다 많이 아팠습니다. ㅠㅠ 그래도 남자라고 참았는데 돈도 싸게 먹히고 좋지 않냐고 속으로 자위하면서.. (병원에서는 20만원 정도인데 야매는 확실히 싸더군요.. 3만원... ㅋㅋ -다음- 남자가 야매로 점을 뺐나 보다. 정상이면 20만 원 하는 것을 야매로 3만 원에 시술 받아 흡족하다 했다. 싸긴 정말 엄청 싸다. 6배나 싸니 야매가 판을 칠만도 하다. 야매라는 말은 예전에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말이다. 동네 미장원에서 정식으로 빠마 할 돈이 없던 시절 우리 집에는 야매 미용사가 드나들었다. 어머니가 빠마 하는 날이면 동네 아줌마들이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 양 하나 둘 모여 툇마루를 채우고도 모자라 안방과 건넌방까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린 우리는 밖으로 밀려났던 기억이 새롭다. ▲ 일본 성형외과의 얼굴 어림셈(견적) 광고, 특히 주름 1센티당 10,5000엔(한화1,183,000원)이란 말이 흥미롭다. 지금도 썩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는 비릿한 화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곧 다가올 68주년 광복을 앞두고 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조선인강제연행 현장의 궤적을 찾아서 1] 기타큐슈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일본의 절이나 신사(紳士)에 가면 작은 나무판에 소원을 적어 걸어 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를 에마(繪馬)라고 한다. 에마는 개인의 소원을 적어 거는 소형에마와 여러 사람(단체)의 소원을 거는 대형에마가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보면 절이나 신사에 살아있는 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신메(神馬,しんめ)라고 하는데 말은 비싸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바치기 어려웠다. 한편 절이나 신사에서도 말을 시주로 받는 경우에는 관리가 어려워 말 대신에 나무나 종이 또는 흙으로 빚은 말 형상의 시주를 대신 받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에마(繪馬)가 등장한 것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 때부터이다. ▲ 헤이안신궁, 청수사, 후시미나리대사에 걸린 에마들(왼쪽부터 시계방향) 그러던 것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가 되면 나무판 뒤의 그림을 말(馬)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교토의 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大社)의 경우에는 여우를 그리기도 했다. 그 뒤 오다노부나가와 풍신수길 시대인 안도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1573-1603)가 되면 저명한 화가들이 본격적으로 에마 작업에 합세하게 된다. 서로 경쟁
[그린경제 = 이윤옥문화전문기자] 1958년 4월29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기일 내에 귀대 못한 두 군인 기합 겁내 자살 이란 기사가 보인다. 사연인즉슨 부대에서 서울로 물자 구입을 위해 파견한 김 아무개 이등병과 이 아무개 이등병은 부대에서 돌아오라는 날짜를 넘겼다. 구매물건을 사지 못해서였는지 어떤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두 군인은 서대문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45구경 권총으로 김 이등병이 동료를 쏘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다. 기사에는 귀대일자가 25일로 되어있으니 아마도 이등병인 두 사람은 구매할 물자를 구입하지 못해 방방 뛰다가 그만 날짜를 넘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병장쯤 되었다면 그냥 귀대하여 구매하려는 물자가 없다고 둘러 댈 수 있을지 모르나 이들은 이등병이었다. 혹시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하다가 날짜를 어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기사에는 자세한 말이 없다. 기합이란 말은 군인사회 뿐 아니라 초중고에서도 흔히 쓰인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기합 주었다가 동영상으로 찍혀 구설수에 오르거나 기합이 지나쳐 폭력으로 낙인찍히는 경우도 꽤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기합(氣合)풀이를 보면, 「1」어떤 특별한 힘을 내기 위한 정신과 힘의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다카쿠신사(高來神社)는 명치 때만 해도 고려신사로 불렸다. 고래신사연혁 기록에 따르면 1843년 만 해도 천태종 소속의 고려사(高麗寺, 고구려를 뜻함)였으며 도쿄 우에노에 있는 관영사(寬永寺) 말사로 나와 있다. ▲ 신편사가미국풍토기에 나오는 1883년 당시의 고려사경내도 고려사라 되어 있다. 영산(靈山)이라 불리는 고려산은 고래신사가 들어 서 있는 바로 뒷산이며 이 산 정상에는 상궁(上宮)이라 일컫는 전각이 있었다. 이곳을 사람들은 고려권현사(高麗権現社)라 불렀다. 서기 854년에는 자각대사 엔닌(慈覺大師, 円仁,794-864)에 의해 오른쪽 봉우리에는 백산권현(白山権現)을 모시는 백산사(白山社)가 세워졌고, 왼쪽 봉우리엔 비사문천(毘沙門天)을 모시는 비사문천사(毘沙門天寺)가 세워졌는데 이 두 고려신사를 합쳐 고려삼사권현(高麗三社権現)이라 불렀으며 이는 사가미(相模) 지방 최고의 명신신사로 한 몫을 했던 곳이다. 여기서 잠시 독자들은 혼동을 일으킬 것이다. 고려사(高麗寺)는 무엇이고 고려신사(高麗神社)는 무엇인가?하고 말이다. 같은 번지수 경내에 절도 있고 신사 건물도 있는 것은 일본고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