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영월 청령포 푸른 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홀로 그곳에 보내져 한양의 하늘을 원망하다 숨을 거둔 열일곱 살 임금 단종! 한순간에 지아비와 헤어져 평생을 한으로 살아야했던 정순왕후! 세조의 부도덕한 정권찬탈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육신(死六臣) 등 세상일이 순리대로 되지 않고 역행하는 바람에 생긴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어찌 일일이 셀 수 있을까마는 충정공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1408~1456)의 삶 또한 이와 관련되어 목숨을 끊었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을까? ▲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쇠기마을에 있는 충정공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선생 무덤(왼쪽 박심문, 오른쪽 부인 청주한씨 무덤) 어제는 충정공 박심문 선생과 부인 청주 한 씨의 무덤이 있는 수억이 마을(일명 쇠기마을)을 다녀왔다. 길찾개(내비게이션)가 있다고는 하지만 무덤까지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서 원당역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쇠기마을의 약간 외딴 곳에 있는 청재공 재실을 겨우 찾아 무덤에까지 다녀 올 수 있었다. 세조 2년(1456)에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소임을 마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의 용만(龍灣)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각종 생태도시들의 도로포장에는 마사토 포장을 한다고 하고... 분재나 뭐할 때도.. 마사토 쓴다고 하는데요. 마사토란 무슨 흙 인가요? -다음- 듣고 보니 무슨 흙인지 궁금해진다. 화분에 많이 쓰는 마사토는 무슨 흙을 말하는 것일까? 먼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말이 없다. 국어사전에 없는 말들은 대부분 일본말인 경우가 많다. 그럼 일본국어대사전 《大辞林》을 보자. ま‐さご【真砂】細かい砂。まなご。いさご。「浜の―の数ほどもある事例」라고 나와 있다. 번역하면,자잘한 모래(고운 모래가 아님),바닷가의 잔모래, 수없이 많음의 비유로 나와 있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마사토가 아니라 일본발음은 마사고(まさご)라는 점이다. 이것을 한국인들이 마사(真砂) + 토(土)를 붙여 발음하는 것으로 역전(驛前) + 앞(前) 처럼 발음하는 것과 같다.우리 국어대사전에없는 마사토를 어느 날 초등학생 아들이 묻는다면 뭐라 설명할 것인가? 인터넷에는 그런 사람을 위해 어떤 이가 친절히 마사토에 대해 설명을 해놓았다. ▲ 마사토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질문자님도 한 번쯤
[그린경제= 이윤옥기자] 한국에서는3․1절이나 8․15 광복절은 물론이고 학교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국가 주요 행사 날에는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는데 '국민의례(國民儀禮)'가 그것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에는 국민의례를공식적인 의식이나 행사에서 국민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격식,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따위의 순서로 진행한다라고 점잖게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쓰던 말이다. 《영남판교회100년사, 霊南坂教会100年史》에 따르면 国民儀礼(こくみんぎれい)とは、日本基督教団が定める儀礼様式のことで、具体的には宮城遥拝、君が代斉唱, 神社参拝」である。라고 정의하고 있다. ▲ 국민의례란 기미가요,궁성요배,신사참배의 세가지 행위를 말하는 것임(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번역하면 국민의례란 일본기독교단이 정한 의례의식으로 구체적으로는 궁성요배, 기미가요제창, 신사참배이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수원의 논개 33인의 꽃 “김향화” 이 윤 옥 하얀 소복 입고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대한문 앞 엎드려 통곡하던 이들 꽃반지 끼고 가야금 줄에 논다 해도 말할 이 없는 노래하는 꽃 스무 살 순이 아씨 읍내에 불꽃처럼 번진 만세의 물결 눈 감지 아니하고 앞장선 여인이여 춤추고 술 따르던 동료 기생 불러 모아 떨치고 일어난 기백 썩지 않은 돌 비석에 줄줄이 이름 석 자 새겨주는 이 없어도 수원 기생 서른세 명 만고에 자랑스러운 만세운동 앞장섰네 김향화 서도흥 이금희 손산홍 신정희 오산호주 손유색 이추월 김연옥 김명월 한연향 정월색 이산옥 김명화 소매홍 박능파 윤연화 김앵무 이일점홍 홍죽엽 김금홍 정가패 박화연 박연심 황채옥 문롱월 박금란 오채경 김향란 임산월 최진옥 박도화 김채희 오! 그대들 수원의 논개여! 독립의 화신이여! ▲ 청초한 김향화 모습(사진 게옹, 수원박물관 이동근 전문위원) 김향화(金香花, 1897. 7. 16~ 미상)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들은 고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었다. 당시 고종 임금의 승하 발표가 나자 기생, 광대, 배우들은 모두 휴업을 하고 근신에 들어갔다. 그리고 덕수궁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사카고우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집안 최초로 여성 세습자가 나왔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13대 째를 이은 사카고우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선생의 세습기념전(襲名記念展)입니다. 차도일여(茶陶一如)로 세상에 알려진 하기야키(萩, 하기도자기)는 이조도기(李朝陶技)를 계승하는 종가로써 4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유서 깊은 명문도예 집안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작년에 13대 세습을 받아 처음 발표하는 다완(茶碗)을 중심으로 품격 높은 작품 50점을 선보입니다.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위는 일본의 고급 백화점인 다카시마야(高島屋)에서 소개한 도자기전시회 안내문이다. 도쿄니혼바시 다카시마야(日本橋高島屋)점에서 작년 6월 열린 습명기념 13세 사카고우라이자에몬덴(襲名記念 十三世 坂 高麗左衛門展 전시회 주인공인 사카고우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은 임진왜란 때 도공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 이경(李敬)의 13대 손이다. 이경(李敬)보다 먼저 형 이작광(李勺光)이 일본에 건너갔는데 이작광은 당시 진주 근처의 관요(官窯)에서 일하다가 임진왜란 때 동료 도공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훗날 가업을 잇게 된 동생 이경 (李敬,1568~1643)은 당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청정 (加藤淸正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앞장선 가토기요마사를 말함)의 일에 대해 승지의 의견은 어떠한가? 선조의 질문에 홍이상이 답하길, 오랑캐들이란 짐승과 같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당당하면 절대로 애걸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말한 것을 보면 너무나 흉악스럽습니다. 우리나라로서는 그들이 중국군과 서로 버티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무슨 조처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강화만은 반드시 이루어서는 안 됩니다. 대의(大義)로 말하면, 중국의 입장에서는 혹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나라로서는 만세토록 기필코 갚아야 할 원수들인데 어떻게 그들과 강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도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27년(1594) 4월 1일) ▲ 모당 홍이상 무덤 모당 홍이상(洪履祥,1549-1615)은 선조임금으로부터 신임이 컸던 인물로 고양 8현(8賢) 가운데 한 분이다. 고양시 성석동에는 선생의 무덤과 신도비가 서있는데 신도비에 비친 모당 선생의 인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났다. 자식의 분분을 지켜 하나같이 성인
[그린경제=이윤옥 기자]최근 일본의 역사왜곡은 극에 달했다. 종군위안부를 부인하는가 하면 여전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려 한국인들의 분통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 내에서 하는 것에 성이 안차 세계 각국에 역사 왜곡을 부추긴다. 문제는 이들 나라들이 아무런 고증없이 일본을 따른다는 다는 것이다. 기자는 중국 섬서성 유적답사 여행을 하는 중이다. 그 여행 중에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역시 왜곡의 현장을 보았다. 역사박물관 제3전시실 당나라 역사전시관에 당시의 한중일 지도가 나오는데 여기에 동해를 분명히 일본해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 중국 섬서성 역사박물관 제3전시실 당나라 역사전시관의 당시의 한중일 지도, 동해를 분명히 일본해로 표기해 놓았다.(붉은 줄로 표시) 당나라시대에 해양술이 발달되지 않아 일본은 신라 배를 이용해야 겨우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역사서가 증명한다 그런 상황에서 왜국이 바다 이름에 신경 쓸 틈이 없었을 것은 자명하다. 또한 분명한 사실은 과거나 현재나 일본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이날 역사박물관을 관람한 한국 관광객들은 섬서역사박물관이 이에 대한 신속한 시정해주기를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개성 31 만세운동을 쥐고 흔든 투사 어윤희 이 윤 옥 동학군 앞장선 남편 신혼 3일 만에 왜놈 칼에 전사한 뒤 나선 독립투사 길 저 앙큼한 년 저년을 발가벗겨라 협박 공갈하는 순사 놈 앞에 서서 스스로 홀라당 옷을 벗은 그 용기 이화학당 어린 유관순 함께 잡혀 먹던 밥 덜어주며 삼월 하늘 우러러 보살핀 마음 만세운동으로 군자금 모집으로 애국계몽운동으로 헐벗은 고아의 어머니로 살아낸 꺼지지 않는 불꽃 여든 해 삶 마치고 돌아가던 날 내리던 희고 고운 눈 순결하여라. ▲ 개성 31 만세운동을 쥐고 흔든 독립투사 어윤희 시화(시 이윤옥, 시회 이무성) * 어윤희(魚允姬, 1877.6.30~1961.11.18 ) 어윤희 애국지사는 당시 만세운동과 연루되어 형사들이 수갑을 채우려 하자, 천하 만방에 여자에게 수갑을 채우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에 있느냐?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갈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하고는 땅에 동그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서서 여기 며칠을 서 있으라 해도 그대로 서 있을 나다.라고 오히려 당당히 큰소리를 치며 형사들을 기죽게 하였다. *어윤희 애국지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1권에
[그린경제=이윤옥 기자]고려신사 도리이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나있는 조붓한 길은 성천원 (聖天院)가는 길이다. 제법 넓은 마당을 낀 주택 몇 채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200여 미터 걸어가다 보면 커다란 주차장이 나타나고 돌로 만든 듬직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 170년 역사를 지닌 고색창연한 성천원 산문 성천원 산문(山門)으로 일컬어지는 고색창연한 2층 산문은 170년 역사를 지닌 중후한 건물로 이 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가면 약광의 무덤으로 일컬어지는 작은 전각이 나오는데 전각 안에는 다중석탑(多重石塔)이 귀퉁이마다 마모된 채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서있다. 그 안쪽에는 고려왕묘(高麗王廟)라는 현판이 깊숙이 걸려있어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양광왕이 죽자 고려명신으로 맏들어 고마신사의 고려계도(高麗系図)에는 약광이 죽은 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성 외곽에 묻고 그 앞에 영묘(靈廟)를 세웠으며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약광왕 무덤은 초라했다. 아무렴, 막강하다는 수,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유감없이 늠름한 기상을 보여주던 씩씩한 고구려, 드넓은 중원 벌의 왕자
[그린경제=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일본의 관동지역은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일본에서 고구려는 '고마'라고 발음한다. 반면 고려시대의 고려는 '코우라이'라고 함을 이해하고 읽어주었으면 한다.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사이타마현에는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마신사(高麗神社)가 있다. 이곳은《일본서기》에 보이는 고구려 약광(若光)을 모신 사당으로 고구려인들은 이 일대를 개척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과 함께 건너온 약광왕 일행을 떠올리는 땅이름과 약광왕을 모시는 신사와 절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큰 규모로 남아 있는 고마신사(高麗神社)와 바로 옆에 있는 약광왕을 모시는 기도사찰 성천원(聖天院)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1시간 여 거리에 있는 승낙사(勝樂寺) 불장원(佛藏院) 등이 있다. 유서 깊은 관동지방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여 소개한다. ▲ 시골 간이역을 연상케 하는 주홍빛 기와지붕의 소박한 고마가와(高麗川)역 1월의 동경은 서울처럼 춥지 않다. 도심엔 동백과 산다화 꽃이 키 낮은 울타리가 되어 피어 있고 주택가 거리마다 팬지꽃 화분이 얼지 않고 색색으로 피어있다. 사이타마에 있는 고구려마을을 찾아 나서던 날도 서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