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오뉴월 하루를 놀면 동지섣달 열흘 굶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만큼 오뉴월 농촌의 하루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테고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은 손님으로 인해 일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경계하는 속담입니다. 바쁠 때는 고사리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할 일이 많은데 요즘 농촌에는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실업자는 넘쳐나는데 중소기업 및 농촌에는 일할 사람이 없는 사회는 그다지 건강해보이지 않습니다. 엊그제 화천에서 하우스 농사를 거들고 왔습니다. 밖의 기온보다 10도는 더 높은 듯 한 하우스 안에서의 일은 힘듦 이전에 열기와 땀과의 전쟁입니다. 그래도 식물들은 따뜻한 온도와 촉촉할 정도의 습기를 좋아하니.... 하우스 안은 농작물에 최적화된 환경일지는 모르겠으나 농부들이 일하는 환경으로서는 최악입니다. 같은 햇볕과 같은 거름을 먹고 사는데도 하우스 안과 밖의 농작물 성장 속도는 두 배 이상의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20일 전에 심어 놓은 고추가 성장을 이루어 하얀 꽃망울을 이었고 앙증맞게 작은 고추가 꽃마다 매달려 있습니다. 이 작은 것이 커서 식탁에 오른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위대한 섭리 말고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뜻하지 않게 선거로 맞이한 휴일사전 투표를 마쳤기에 가평에 있는 명지산을 찾았습니다. 입구부터 흐드러진 철쭉의 화사함은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명지(明智)”라는 이름으로 보아 지혜를 밝혀주는 산이니 산에 오르기 전에 자못 기대가 컸습니다. 1,267미터의 산은 자못 높은 편이었는데 들머리 고도가 낮은 이유로 꼭대기까지 네 시간을 걸어야 하는 긴 산행입니다. 오르는 길 양안으로 피어난 연분홍 철쭉의 고운 자태가 멋스럽고 꼭대기엔 봄의 마지막 자락이 아쉬워 곱게 물들여 보내려는 진달래의 가녀린 몸짓이 애처로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힘들 때 생각이 깊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산도 오를 때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내려갈 때는 별 생각 없이 내려가니 말이지요. 그래서 잘 지은 대학은 가장 높은 곳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공감능력과 배려심 또한 고난 속에서 깊어가는 것이니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일찍 철이 드는 이유일 것입니다. 나물을 뜯을 요량으로 오른 산이 아니기에 그냥 눈으로 만날 수 있는 산나물은 굳이 취하지 않아도 반가움이요 풍요로움입니다. 삽추, 나물취, 우산취, 둥글레, 잔대, 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봄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벚꽃이 폭발하듯 피었다가 꽃비 되어 장엄하게 스러져가고 남은 대지엔 조팝나무가 하이얀 순결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제 곧 아카시아와 라일락의 향기가 진동하겠지요. 봄에 돋아나는 생명의 잎은 유난히 싱그럽습니다. 그 아기 손 같은 연한 새싹이 두꺼운 대지를 밀어내는 것을 보면 자연에 깃들어 있는 위대함이 느껴집니다. 작년에 화사한 꽃을 피웠던 백합이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고 주인의 배려로 겨우내 실내에서 동사를 면했던 달리아와 칸나도 분주히 싹을 틔워 올렸습니다. 참 좋은 계절이지요. 산이 푸르러지고 있습니다. 봄의 푸름은 같은 푸름이 아니어서 이맘때의 산의 색을 흉내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천재적인 미술가가 있어 색의 마술을 부린다고 한들 여기저기서 색색으로 수놓아지고 있는 자연을 모방하기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찬란한 색을 감탄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 썩어가는 고목에 생명의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은 희열입니다. 그러니 인고의 세월, 겨울의 절망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울한 마음을 버리고 삶의 환희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봄이니까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가끔 무료할 때 유튜브에서 마술쇼를 봅니다.마술은 신기함으로 포장된 눈속임의 미학을 보여주지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그 속내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속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저변에는 속임수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하지만 그냥 재미로 보는 것에 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진실만을 보지 않습니다. 엊그제 <재심>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에 그 속 주인공의 억울함이 큰 울림으로 다가 왔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 진범이 나타났음에도 자신이 한 수사의 정당성과 사회적 영달을 위하여 거짓으로 일관한 기득권자의 모습은 우리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민낯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울컥하였습니다. 우린 어쩌면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거짓을 택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느슨한 잣대로 타협을 통해 세상과 영합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정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 있고 보여지는 나의 모습에 엄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남이 보지 않아도 같은 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저의 두 번째 책 제목이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두뇌로 인식하는 것보다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붙여본 제목입니다. 경험은 생각보다 강한 것이니 말입니다. 자동차의 비약적인 증가와 탈것이 만연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걷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걷는 것이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버스 두 정거장 정도 되는 짧은 거리임에도 자가용을 몰거나, 택시를 부르니 걷는 문화의 실종시대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걷기는 단순한 발걸음을 옮기는 행위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우리네 삶의 궤적이 존재하고, 배려와 존중도 함께 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 세대는 남녀가 같이 걷는 것을 데면데면 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삼사 미터 앞에 가고 여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지요. 그 간격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 걷는 속도는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단지 사회적 체면 문화가 그런 문화를 창출한 것이지요. 그들이 따로 떨어져 걷는다고 해서 사랑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같은 공간에 함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