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오백나한이란 오백명의 '나한'이란 뜻인데, '나한'이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가운데사람으로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말로, 본래는 '아라한'이었다. 그런데, '아'자를 빼고 부르기 쉽게 '나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이 깨달음을 위하여 수도정진하면 그 깨침의 정도에 따라, 4단계를 거쳐야 아라한이 된다고 하는데, 그 첫째단계는 '수다원' 단계이고, 둘째단계는 '사다함'인데 사다함과에 이른 사람은 한번은 윤회해야 하는 단계이며, 셋째단계는' 아나함'이고, 마지막 단계에 이른 수도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아라한'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단계로 불가에서는 중생계에서는 부처님과 같은 단계로 여기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많은 수도자들이 부처님처럼 '아라한'과의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부처님은 수많은 아라한과에 든 제자들을 거느리고 주요 경전을 설하고 또수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처럼 해탈의 경지에 들었기에 그 능력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불자들에게는 자신의 작은 소원정도는 이루어줄 수 있는 능력있는 의탁자로 아라한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생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 곁에는 살아서 바보라는 말 듣기를 좋아했던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정치인으로 쉽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자기 옆에 무수히 많았지만 그 길을 마다하고 굳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가 그 길을 택하여 갔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길은 비록 어렵지만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노무현을 우리는 바보라고 불렀다. 그런 바보 노무현은 그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국민들이 있어서 천신만고 끝에 바보들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 나라를 바보들의 세상이 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바보를 손가락질하며 비아냥댔고, 그를 따르던 많은 국민들은 그를 보호하거나 변호해주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는 어렵사리 대통령직을 마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피폐한 고향농촌을 되살리는 일에만 매진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정치에서는 그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끊임없는 뒷조사와 먼지떨이, 그리고 누명이 씌워지자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종로구 북한산 사모바위 아래남쪽 기슭에 자리한 승가사는 조선시대 한양주변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절로 서울 북쪽에 있다. 본래 창건은 통일신라 경덕왕 15년(756) 당시 당나라의 생불로 추앙받고 있던 천복사의 승가(僧伽)대사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고 한다. 승가사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의 거의 정상부분인 8부능선에 자리하고 있어, 걸어서 올라가자면 구기동 이북오도청 근처에서 약 1시간 30분은 걸어가야 하기에꽤 힘든 길이나, 지금은 절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매 시간 운행하고 있어, 다리가 편치 않은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런 승가사는 신라이래 고려를 거치면서는 대각국사 의천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할 정도로 유서깊은 절이었다. 그러나조선조에 이르러 전국의 사찰을 통폐합하면서 선교 양종으로 나누었을 때 승가사는 선종으로 구분하여 그 명을 이어왔다. 조선 말기에는 고종의 왕비인 민비가 왕자 낳기를기원하면서 전국의 기도처에 불공을 드릴 때, 이곳 승가사 마애부처님에게시주를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찰의 전각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 남아있는 한국의 전통마을 가운데 주민들의 집을 초가로 이은 마을은 제주 성읍민속마을과 순천 낙안읍성마을이 있다. 다른 전통마을들은 초가집보다는 기와집이 많은 편이나 순천에는 대부분 서민들이 살았던 까닭서인지 민가는 모두 초가로만 이루어져 있다. 제주는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 초가가 아닌 억새로 이은 초가였다. 농촌에서 초가는 벼농사를 짓고 남은 볏집을 엮어서 지붕을 이었다. 옛날 서민들은 감히 기와를 구워서 지붕에 올릴 수 없었기에볏집이 지붕을 잇는 최고의 재료였다. 여름내 피땀흘려 농사를 짓고, 벼를 수확하는 가을걷이를 다 마친 뒤 주민들은 자기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볏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남자들은 볏집을 뽑아서 새끼를 꼬고 또 초가 이엉을 이었다. 이런 일들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작업으로 했다. 노동의 고단함 속에서도 노래와 덕담을 나누며 작업을 했으며다 이은 이엉으로마을 주민들은 이집 저집을 돌아가면서 지붕을 씌었다. 지붕에 이엉을 얹는 일은 고난도의 노동이다. 자칫 잘못하다 떨어지면 크게 다치는 사고도 많아서 농사의 끝인 지붕 개량은 큰 일가운데 하나였다. 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순천 선암사로 들어가는 조계산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옛날에 쌓은 무지개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는 반원형으로 마치 성문의 앞처럼 보이지만, 돌로된 반원형의 다리를 계곡의 사이에 놓은 것은 절로 들어가는 계곡이 이세상과 천상 사이를 갈라놓은 것으로 공간의 비유적 표현이다. 불교에서 절은 부처님을 모신곳으로, 부처님이 있는 곳은 불국토로영원한 즐거음이 있는 곳이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중생계로 온갖 고통과 생사 윤회가 끝없이 계속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절을 찾는다는 것은, 불상이 있는 산속의 전각을구경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파속에서 시달리는이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의 부처님 세계로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경전상설명의 의미에서중생계와 불국토는 너무도 멀고도 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불교의 이상세계인 부처님이 모셔진 불국토로 나아가는 길에는 상징적으로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다리가 있으니, 그 다리가 바로 이세상에서하늘로 걸쳐놓인 무지개다리다. 그런 의미로 옛부터 절로 가는 계곳에는 많은 다리들이 놓였고, 그 다리는 무지개형상으로 놓았다. 비록 그리 크지도 않은 계곡사이에 놓인 다리이지만, 이 다리는 이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운람산 수도암은 완도의 옆에 있는 고흥반도의 끝자락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운람산의 옛이름은 모악산이었다고 하여, 지금도모악산 수도암이라고도 한다. 작은 절 수도암은 그 창건연대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하며, 그 창건주는 신라 흥덕왕때영헌스님 또는 고려 순종 때인 1083년 도회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연원은 멀고 멀지만, 옛 자취는 별로 없어서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수도암은 조선 후기 미륵신앙의 도량이며 기도하는 절로,절안에 전각들은 작지만, 그 안에는 대웅전, 지장전, 무루전, 삼성각 등이 있어 갖추어야할 전각은 모두 갖추었으며, 그 가운데무루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이나 그 이름은생소하다. 봄이 깨어나는 운람산 수도암은 작지만 매우 아늑한 절로, 절의 입구에 새로지은 재래식 해우소는 자연생태순환의 고리를 잇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있어보여 불교의 순환과 윤회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미륵사는 백제시대 후기에 세워진 거대한 절이었다. 미륵사는 600년대 초기 백제의 무왕이 백제를 미륵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지상에 세운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절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행차하는데, 이때 용화산(지금 미륵산) 아래 연못가에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가던 수레를 멈추고 부처님께 예를 표하였다. 그러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여 무왕은 당시 왕사였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력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연못을 메우고 그 터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불교신앙 중 미래에 다시 올 부처님을 바로 이곳 백제땅 미륵사에 올 것을 염원하며 세운 것으로,백제가 바로 미륵불국토여야 한다는 필연성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신앙에 의하면, 미륵은 석가모니 당시 그의 제자였으나, 부처님 보다 일찍 타계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죽은 후 지금은 천상세계인 도솔천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현재는 미륵보살로 도솔천의 내원궁에서 하늘세계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고 하며, 도솔천에서의 생이 다 되는 날에는 다시지상에 미륵부처님으로 온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구례는 지리산의 남쪽에 있다. 지리산에는 많은 옛절들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절은 화엄사다. 그 화엄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또 하나의 옛절로 연곡사가 있다. 연곡사는 신라시대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이땅에 불국토를 이룩하고자 창건한 절로 화엄사와 함께 연곡사가 있다. 연곡사는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선사들의 수행처로 이름 높은 고승들이 많이 있어,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있다. 지금 남은 자취는 연곡사의 본전인 대적광전 뒷편 오솔길에 있는 3기의 승탑이남아이를 증거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탑비의 몸돌을 누군가 파괴하여 없애버려, 지금은 고승의 행적을 알 수가 없으며 사리를 모신 승탑과 승탑비의 이수와 귀부만이 남아있다. 천만 다행스럽게 승탑과 이수 귀부는 손상되지 않고 거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연곡사는 선가의 수도도량으로 이름이 높아 전각들이많이 있었고임진왜란 때까지는 온전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절과 궁궐들이 불에 탈때 이곳 연곡사도 일본군의 방화로불타버렸다. 그런 연곡사는 1600년도 중반 임진왜란 뒤에태능스님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봄이 되니 만물이 다시 태어난다. 겨울철 앙상한 가지만 남긴채 죽은 듯 하던 매화나무에 봄의 기운이 감돌자 땅속에 물을 빨아올려 움을 틔우더니 드디어 감추었던 붉은 꽃을 피워낸 것이다. 이런 자연의 순환은 계절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다.생명 있는 것의 죽음이란계절의 순환처럼봄에 피어나서여름에는 번성하고, 가을이면 단풍들고 겨울이면 죽어가는 이치와 같다. 죽은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봄이 오면 소생하듯 만물은 겨울이라는 죽음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다시 봄이 되면 피어나듯 끝없이 윤회하는 것일 뿐이다. 식물의 세계가 사계절에 따라서 윤회하는 것이라면, 동물의 세계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돌고 또 돈다고 생각해서 육도윤회가 된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생에서 덕을 쌓고 살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좋은 집안에 태어나며, 이 세상에서 악행을 하고 살면 내생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윤회론이 생겨난 것이라 생각된다. 죽은 듯 앙상한 가지에 새봄을 맞이하여 피어난 화엄사 홍매화는 만물의 소생함을 알려주고, 전국의 많은 사진가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꽃이 피어있는 날은 며칠 안되기에 그 아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태안반도에 자리한 신두리 해안은 한국에서 모래언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사막이 없는 한국에서 언듯 사막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자연유산으로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된문화재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빙하기 이후 1만 5천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태안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하여 해안가의 모래를 바람이 쓸어올려 모래언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해안가의 개발로 건축물이들어서고, 해안가에는 제방이 들어서면서바람의 방향이 바뀌고,세기가 약해져 더이상 모래를 쓸어올리지 못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모래언덕에는 갈대들이 뿌리를 내려 풀밭이 되고, 세월이 더 가니 갈대가 머금은 물에 소나무도 자라나 신두리 안쪽은 이미 소나무 밭이 되었다. 이렇게 세월이 더 흐르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해안모래언덕인 신두리도 곧 없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신두리 바닷가에는 물빠진 모래밭에 조개와 개불 등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