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말 출생하여 고려 전기 선불교를 널리 펴는데 공이큰스님으로 추정되는 홍법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와 스님의 사리탑이다. 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탑비는 세월의 풍파 속에 마모가 심하여판독하기 어려운 실정이고, 아름답게 그지 없었던 승탑도 상륜부는 사라지고 옥개석도많이 손상되어 아쉬우나, 그래도 비문을탁본하여 판독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충주 향토문화대사전 발췌) 홍법국사는 신라말인 912~916년 출생하여고려 태조(왕건)시절 출가하여(921~927)공부하다. 930년 마가갑사(개경근처의 큰 절)에서 수계득도하였다. 홍법스님은 선종의 법을 전수받기 위하여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5년 여의 수도를 거친후 귀국하여 선종의 가장 높은 품계인 대선사의 품계를 받았다. 이 때는 고려 성종시절로 추정된다. 홍법대사는 말기 충주의 정토사에 머물렀고,고려 목종때 국사로 책봉되어 국가의 스승으로 예우를 받았으며, 이후 타계하자, 국가적인 스승의 예을 다하여 탑비의 이름에 스님의 법호와 실상이라는 시호를 부여 받았다. 그래서 그의 탑에는 홍법국사실상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려 왕실은그의 행적을 두루 섭렵하여 명문장가로 하여금 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난 해 말,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시작하여 온 국민을 분노에 빠트린 한국의 정치는추운 겨울동안 그 추위를 마다않고광장에 모여들어작은 촛불을 켜며, 국민들의 분노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그열망이 광장의 함성으로 분출하였다. 그리하여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판결로대통령으로서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끝이 났다. 3월 13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의 막중한 자리는 2달 가까이 비어 있는채, 한국은 상당기간 동안 정국이 중심을 잡지 못한채 급변하는 세계속의 선장도 없이 요동치는 작은 배가,태평양 가운데 떠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상황속에서도 국민은 의연하였고, 국민의 여망을 촟불에 의지하며 하느님의 보우를 기다렸다. 그리고 헌법이 정한 기간동안 보궐선거를 통하여 새 대통령를 뽑기위한대통령선거기간을 보내야 했다. 그 결과, 그제 5월 9일 전국적으로대통령선거가 실시되고, 어제 5월 10일 새롭게 문재인대통령이 당선되었다.문재인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피마른 선거전의 피로를 쉴 틈도 없이 당선자로 결정된 어제 아침에 당선증을 받고, 국립현충원에 들러 선열들에게 인사드리고, 곧바로12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불기 2561년 석가모니 탄생을 축하하는 연등들이 전국의 절마다 아름답게 걸렸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을 뜻 깊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 부귀영화를 팽개치고 인간의 궁극적인 고민인 인간존재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인생과 생명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체득하여 부처라 부르는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으며, 누구나 생노병사라는 존재하는 생명체로서 길을 벋어날 수는 없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것으로 끝이 아니라, 누구나 깨달음을 얻는다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의 씨앗을 불교에서는 '여래장'이라 하며 이를 풀이하면 여래의 씨앗이 내장되어 있다는 뜻이된다. 따라서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고 큰 행사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 깊이 잠들어있는 여래장(불성)을 잊지 않기 위함이며, 그 여래장을 깨우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서원과 축원을 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전통 불교행사인 연등행사는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화려한 행사로, 한국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오신날은 불자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나 세월만 지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인간으로서 자신 뿐 아니라 인간 모두의 운명 그리고 우주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자 출가 하여 스승을 찾아 다니며 수행도 하고 죽음의 직전까지 고행도 하며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부처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삶을 45년 동안 살았다. 그런 부처님이 태어난 날을 부처님오신날이라 정하여 2640년이 지난 지금도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불자들은 기념하는 것이다.! 올해는 불기2561년으로 불기(佛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해부터가 아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해부터 시작한다. 서울 한복판 경복궁 근처에 있는 송광사 서울 분원인 법련사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 저물어가는 저녁 법련사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해걸음 야간탑돌이를 하였다.
ㅣ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임진왜란으로 발생했던 전국토의 수난이 처참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다행히 임진왜란 발발 후 전라도 지방은 조선수군 통제사이순신장군의 지휘아래 남해를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정유재란까지 전라도 지역은피해가 없었으나, 1597년 명나라와 휴전협상이 결렬되자재차 침략한 정유재란으로일분군이 밀어닥치면서 전라도도 황폐화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때 이순신장군은 조정대신들의 모함과 이순신장군에 대한 열등감이 두려움으로 다가온 선조가장군의 모함을 받아들여 어명을 어긴 죄로 이순신장군을 압송하여 가진 고문을 자행하였고, 처절한 임진왜란중 오진 승승장구하던 전쟁 중에 최고의 장수 이순신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천만 다행으로유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이순신장군은목숨만 부지한채 빈 껍데기만 남은 수군의 일개 졸병으로 다시 복무지로 가던 중 급박한 전쟁의 상황을 알게되자 선조는 이순신장군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수군통제사로 다시 제수되었지만 휘하 장수도 이를 따르던 병사도 또 싸움에 필요한 함선도 각종 무기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러나그는이를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수군재건을 위하여 최선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종시에는 '비암사'가 있다. 이 절은 1350여년 전패망한백제의 왕들의 사무친 원혼을 위로하는 행사로 매년 4월 15일백제영산대재를 시행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1350년 전 서로 뺏고 뺏기는 전장이던 신라와 백제의 땅에서 백제는 풍요로운 평야지대를 점하고 있어 신라에 비해 훨씬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으나, 잠시 방심한 차에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백제를멸망시키겠다고 달려드는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망했다. 그러나 그렇게 600년이 넘게 이어오던 종묘사직을 마감할 수 없다며, 일본에 진출해있던 백제왕족들과 그 존비속들을 모아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한때 다시 백제가 되살아나는 듯도 하였지만, 부흥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모함과의심하여 결국 자멸하고 말았던 백제! 본시백제인은 농산물의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가 발달하였고, 해외로 진출하여 외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여 몹시 개방적인 문화를 가꾸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본래 문화에 외래문화를 가미하여여유롭고 수려한 종교적 미술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한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우던 백제는 신라가 끌어들인 당나라군과 싸우다 자중지난으로 결국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한국의 많은 산 중에 지리산만큼 특별한 산도 드물다. 지리산은 1,915m 인 천왕봉을 주봉으로 많은 봉우리가 즐비하다. 그중에 반야봉은 지리산의 제2봉으로 최고높이가1,732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과 남으로는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을 품고 있다. 피아골은 바로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작은 물줄기가 약 20km의 계곡을 따라서 흘러내려 결국에는 구례 섬진강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이 피아골은 그 이름부터 특이한데, 그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옛날 어렵게 살던 시절, 사람들은 지금처럼 쌀밥을 먹지 못하고 비옥하지 못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피농사를 지어서 식량으로 삼고 살았다. 그런데 현재 피아골 골짜기에 폭정에 도망친 많은 사람들이 골짜기에피(稷)농사를 지으면서 근근히 살아갔다. 이렇게 피(稷)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 피밭골로 불리우던 것이 오랜세월 지나면서음이 변하여 피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피아골은 전남 구례 산동면에 자리 잡은 연곡사에서 지리산 반야봉을 향하여 오르는 계곡길을 말하는데, 이곳은 가을이면 단풍나무로 된 계곡이 온통 붉게 물들어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가을 단풍철이면 산
ㄱ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연곡사는 백제성왕 2년인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연기조사는 화엄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연곡사를 창건하기 전 연기조사가 왔을 때이곳은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에 제비들이 물장구를 치면서 노는 것을 보고, 그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면서절 이름을 연곡사라고 붙였다고 한다. 백제를 거친 이후 통일신라 말에는 고승인 도선국사와 현각대사가 주석하며 연곡사의사세를 떨쳤다. 이런 역사의 자취는 절 안에 있는 승탑들과 탑비들이 남아서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시대를 지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불의 오랜 시대를 지나며차츰 사세가 약해지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절 안에 모든 전각들이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는 한국내 대부분의 절들과 마찬가지로, 승병으로 대항했던 근거지였던 연곡사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완전히불살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연곡사에는 소요대사가 스님들을 모아 대대적으로 자체 중창불사를 진행하였고, 선승400여 스님들이 선풍을 날리며 불학과 선학 그리고 염불을 갖춘 종합 수도장인총림으로도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차츰 기울어가는 조선왕조에 근근히 이어오던 불교의 맥 마져 1907년 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인류 문명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 문명이다. 이집트 인들은 기원전 3,500년 전부터 나일강 주변 신성한 땅을 찾아 거대한 피라밋을 만들고,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고자 죽은자의 육신이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어 영원의 신성 장소로 여기는 곳에 묻었다.그중에 왕들은 크고 작은 피라밋에 잠들게 했다. 땅속에 묻지만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한 것이다. 태어난 사람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인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부단히도 애썼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죽은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그 상상은 굳은 믿음이 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과 종교가 되어 사후 세계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육신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갖가지 약품을 개발하고, 또 육신의 장기를 따로 꺼내 보관하고 방부처리를 하여 미라로 만들었다. 육신이 썩지 않는다는 것은 저승에간 영혼도 영원히 사는 것으로, 그 영혼은 불멸하는 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권력이 크고 부가 많을 수록 그 미라와 관을 비롯한 봉헌물들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알려져 있다. 그 본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을 체득하여 신라로 돌아왔던 도의국사가오랫 동안 거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의국사는처음에는 신라에서 화엄종계의 스님으로 출가하였다. 당시신라는 교종(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로 당시에는 화엄종이 대세였다) 그는 화엄사상의 종주국인 중국에 들어가 중국의 화엄종을 익히고자 하여 의상대사처럼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도의스님은당나라에 들어가 화엄종과 정토종, 법상종, 구사종, 삼론종 등 대표적 교학을 익히고 이후 여러종파를 두루 섬렵하는 교학 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당나라 장안으로 들어가 남종선법을 접하게 되었다.이후 도의는 교학(경전위주)불교를 부정하고 조사의 심인법을 수립하여 무념무수설(無念無修說)을 강조하였다. 무념무수설이란 일체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편견이나 자기만의 아집에서 벗어나는 대 자유인의 경지에 들어 수행하고 닦을 필요더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당나라에서신라로 돌아와 교학(화엄학)을 부정한 도의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머물지 않고 산세가 수려한진전사에 거하면서 제자인 염거화상에게 선법을 전했다. 그리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