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오신날은 불자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나 세월만 지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인간으로서 자신 뿐 아니라 인간 모두의 운명 그리고 우주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자 출가 하여 스승을 찾아 다니며 수행도 하고 죽음의 직전까지 고행도 하며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부처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삶을 45년 동안 살았다. 그런 부처님이 태어난 날을 부처님오신날이라 정하여 2640년이 지난 지금도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불자들은 기념하는 것이다.! 올해는 불기2561년으로 불기(佛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해부터가 아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해부터 시작한다. 서울 한복판 경복궁 근처에 있는 송광사 서울 분원인 법련사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 저물어가는 저녁 법련사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해걸음 야간탑돌이를 하였다.
								ㅣ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임진왜란으로 발생했던 전국토의 수난이 처참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다행히 임진왜란 발발 후 전라도 지방은 조선수군 통제사이순신장군의 지휘아래 남해를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정유재란까지 전라도 지역은피해가 없었으나, 1597년 명나라와 휴전협상이 결렬되자재차 침략한 정유재란으로일분군이 밀어닥치면서 전라도도 황폐화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때 이순신장군은 조정대신들의 모함과 이순신장군에 대한 열등감이 두려움으로 다가온 선조가장군의 모함을 받아들여 어명을 어긴 죄로 이순신장군을 압송하여 가진 고문을 자행하였고, 처절한 임진왜란중 오진 승승장구하던 전쟁 중에 최고의 장수 이순신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천만 다행으로유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이순신장군은목숨만 부지한채 빈 껍데기만 남은 수군의 일개 졸병으로 다시 복무지로 가던 중 급박한 전쟁의 상황을 알게되자 선조는 이순신장군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수군통제사로 다시 제수되었지만 휘하 장수도 이를 따르던 병사도 또 싸움에 필요한 함선도 각종 무기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러나그는이를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수군재건을 위하여 최선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종시에는 '비암사'가 있다. 이 절은 1350여년 전패망한백제의 왕들의 사무친 원혼을 위로하는 행사로 매년 4월 15일백제영산대재를 시행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1350년 전 서로 뺏고 뺏기는 전장이던 신라와 백제의 땅에서 백제는 풍요로운 평야지대를 점하고 있어 신라에 비해 훨씬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으나, 잠시 방심한 차에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백제를멸망시키겠다고 달려드는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망했다. 그러나 그렇게 600년이 넘게 이어오던 종묘사직을 마감할 수 없다며, 일본에 진출해있던 백제왕족들과 그 존비속들을 모아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한때 다시 백제가 되살아나는 듯도 하였지만, 부흥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모함과의심하여 결국 자멸하고 말았던 백제! 본시백제인은 농산물의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가 발달하였고, 해외로 진출하여 외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여 몹시 개방적인 문화를 가꾸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본래 문화에 외래문화를 가미하여여유롭고 수려한 종교적 미술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한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우던 백제는 신라가 끌어들인 당나라군과 싸우다 자중지난으로 결국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한국의 많은 산 중에 지리산만큼 특별한 산도 드물다. 지리산은 1,915m 인 천왕봉을 주봉으로 많은 봉우리가 즐비하다. 그중에 반야봉은 지리산의 제2봉으로 최고높이가1,732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과 남으로는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을 품고 있다. 피아골은 바로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작은 물줄기가 약 20km의 계곡을 따라서 흘러내려 결국에는 구례 섬진강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이 피아골은 그 이름부터 특이한데, 그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옛날 어렵게 살던 시절, 사람들은 지금처럼 쌀밥을 먹지 못하고 비옥하지 못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피농사를 지어서 식량으로 삼고 살았다. 그런데 현재 피아골 골짜기에 폭정에 도망친 많은 사람들이 골짜기에피(稷)농사를 지으면서 근근히 살아갔다. 이렇게 피(稷)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 피밭골로 불리우던 것이 오랜세월 지나면서음이 변하여 피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피아골은 전남 구례 산동면에 자리 잡은 연곡사에서 지리산 반야봉을 향하여 오르는 계곡길을 말하는데, 이곳은 가을이면 단풍나무로 된 계곡이 온통 붉게 물들어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가을 단풍철이면 산
								ㄱ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연곡사는 백제성왕 2년인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연기조사는 화엄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연곡사를 창건하기 전 연기조사가 왔을 때이곳은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에 제비들이 물장구를 치면서 노는 것을 보고, 그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면서절 이름을 연곡사라고 붙였다고 한다. 백제를 거친 이후 통일신라 말에는 고승인 도선국사와 현각대사가 주석하며 연곡사의사세를 떨쳤다. 이런 역사의 자취는 절 안에 있는 승탑들과 탑비들이 남아서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시대를 지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불의 오랜 시대를 지나며차츰 사세가 약해지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절 안에 모든 전각들이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는 한국내 대부분의 절들과 마찬가지로, 승병으로 대항했던 근거지였던 연곡사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완전히불살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연곡사에는 소요대사가 스님들을 모아 대대적으로 자체 중창불사를 진행하였고, 선승400여 스님들이 선풍을 날리며 불학과 선학 그리고 염불을 갖춘 종합 수도장인총림으로도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차츰 기울어가는 조선왕조에 근근히 이어오던 불교의 맥 마져 1907년 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인류 문명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 문명이다. 이집트 인들은 기원전 3,500년 전부터 나일강 주변 신성한 땅을 찾아 거대한 피라밋을 만들고,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고자 죽은자의 육신이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어 영원의 신성 장소로 여기는 곳에 묻었다.그중에 왕들은 크고 작은 피라밋에 잠들게 했다. 땅속에 묻지만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한 것이다. 태어난 사람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인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부단히도 애썼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죽은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그 상상은 굳은 믿음이 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과 종교가 되어 사후 세계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육신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갖가지 약품을 개발하고, 또 육신의 장기를 따로 꺼내 보관하고 방부처리를 하여 미라로 만들었다. 육신이 썩지 않는다는 것은 저승에간 영혼도 영원히 사는 것으로, 그 영혼은 불멸하는 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권력이 크고 부가 많을 수록 그 미라와 관을 비롯한 봉헌물들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알려져 있다. 그 본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을 체득하여 신라로 돌아왔던 도의국사가오랫 동안 거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의국사는처음에는 신라에서 화엄종계의 스님으로 출가하였다. 당시신라는 교종(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로 당시에는 화엄종이 대세였다) 그는 화엄사상의 종주국인 중국에 들어가 중국의 화엄종을 익히고자 하여 의상대사처럼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도의스님은당나라에 들어가 화엄종과 정토종, 법상종, 구사종, 삼론종 등 대표적 교학을 익히고 이후 여러종파를 두루 섬렵하는 교학 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당나라 장안으로 들어가 남종선법을 접하게 되었다.이후 도의는 교학(경전위주)불교를 부정하고 조사의 심인법을 수립하여 무념무수설(無念無修說)을 강조하였다. 무념무수설이란 일체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편견이나 자기만의 아집에서 벗어나는 대 자유인의 경지에 들어 수행하고 닦을 필요더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당나라에서신라로 돌아와 교학(화엄학)을 부정한 도의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머물지 않고 산세가 수려한진전사에 거하면서 제자인 염거화상에게 선법을 전했다. 그리고 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스리랑카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최초로 외국으로 전파한 나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생전에도 3번에 걸쳐 스리랑카에 직접 왔었다고 하지만, 불교가 그때 부터 전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300년 즈음, 인도대륙을전쟁으로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전륜성왕 제3대 임금인 아쇼카왕 때다. 아쇼카왕은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하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인도 전역에 부처님의 사리를 분양하여 불탑을 세우고,자신의 아들이었던 왕자를 출가시켜 스리랑카로 보내 불교를 전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진 불교는 스리랑카 전체를불국토로 만들었고, 스리랑카 이곳 저곳에 거대한 불탑을 세우고 절을 지었다. 스리랑카 절 중심에는 거대한 불탑이 있는데, 이곳 불탑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탑은 탑 아래 원형의 지름이 50m 이상으로 매우 크다. 그 넓은면적에 둥근 지붕의 높이는 30m이상이고, 상륜부 또한 둥근지붕 끝에서30m이상으로 높이 솟아나 탑의전체 높이는 60m이상이나 되는큰 탑이다. 탑의 재료는 진흙을 구워서 만든 붉은 적벽돌로,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국토를 꿈꾸었던 신라의 도읍 경주에는 왕궁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이라 이름 붙은 큰 산이 있었다. 한 때 남산에는 수백개의 절이 있고, 그곳마다 탑이 세워지고, 바위에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던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그리고, 널다란 바위가 있는 곳은 바위면을 다듬어 그 위에 석탑을 수없이 만들어 세웠다. 그래서 경주남산을 불국토라고 하였다. 그 중에 오늘은 경주남산 탑곡에 있는 커다란 사각바위를 찾았다. 탑곡에는전체적으로 사각형의 커다란 자연석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면에는 빼곡하게 불상과 보살 그리고 협시신장과 동물 식물들의 그림이 있고, 당시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불탑의 모양도 새겨져 있다. 현재까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 탑곡의 사모바위면에는 34점의 그림(불상, 보살, 신장,탑 동물, 식물등)이 있는데 특히 현재는 전하지 않는 신라가 자랑하던 구층목탑의 형상이 그려져 있어, 신라 황룡사구층목탑의 형상을 추정하는 중요한 자료로 여기고 있다. 옛 신라 고려시대에는 많은 절에황룡사의 구층목탑 등목탑이 있었고, 그밖에 칠층목탑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일본에 많이 있는 오층탑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 오층목탑은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대통령의 비선실세라는 측근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대통령의 탄핵이 마무리 되었다. 처음 한 언론매체가 최순실의 테블릿피씨를 입수하여 그 컴퓨터에 들어있었던 대통령의 연설문 등 국가기밀 유출과 대통령을 통한 사사로운 이익추구 등국정농단들이 만천하에 밝혀지면서추측과 그 추측이 부풀린 의심만이 떠돌던 것들이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냈다. 의심은 현실이 되었고, 재벌을 통한 사익추구의 각종 재단설립과, 재벌들에 주어진 특혜에 국민은 분노하였다. 뿐만 아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국정통치는 국민을 위한 통치가 아니라 국민을 종부리듯 부리기만 할 뿐이었고, 아픈 국민의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지지 않고 오히려 불을 질렀다. 3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호침몰사건의 진상은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덮으려만 하였고, 이것은 세월호에 희생된 가족은 물론 보통 서민들의 마음에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지도자에 대한 반감으로 자리잡았다. 또 재벌들의 돈을 모아 설립한 재단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선실세 최순실과 그의딸만을 위하여 각종 특혜와 비리를 저질렀고, 재단의 구성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겨우수 백명이 서울 광화문광장에모여서평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