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조선말 누란의 위기에 살았던 암행어사 이건창. 그는 1852 강화도에서태어나 1898년 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도정치 하에서 각지방의 수령들에 시달리던 때, 관리들의 비행을 추적하여 이들을 벌주는 일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유배생활을 하게 된 후 벼슬을 포기하였다. 그러자 강직하고 청렴한 그의 성품을 알고 고종은 1880년 간곡히 청하여 다시 그를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백성들의 민폐를 잘 해결해주어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관직은 오래 하지 않았으나, 1890년 한성부소윤과 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이후 관직에 나오지 않아 고종의 노여움을 사 전북지역 고군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적으로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조종하던 성리학보다는 이단시하던 양명학의 학풍을 따랐다. 그는 조선이 당파로 나뉘어 세월을 보냈던 세월을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하여 후대의 당쟁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뒤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이건창 암행어사의 생가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격동의 19세기 중엽, 양극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등이 제국주의로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일 때, 조선은 세도정치하에 백성들은 삶조차도 제대로 영위하기조차 힘들게 지배관료들과 왕의 외척들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이때 수운최제우(1824~1864)는 경주시 현덕면에서 태어나 어리럽고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고뇌하며 고래로 전해오던 각종 사상을 섭렵하고 수도정진하였다. 그러던 최제우는젊은 날 집근처 구미산 기슭에 있던용담정에서 수도하던 중 37세되던 해인1860년 4월 5일하늘의 계시를 받으며 무극대도의 도를 깨친후 새시대가 도래한다는개벽을 선언하였다.한 인간으로 깊은 고난의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어 도를 깨쳤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깨친 가르침을 펼치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들이 민란의 주동세력으로 커질 것을 염려한 조선의 지배층들은, 최제우를 민중선동의누명을 씌워1864년 3월 10일 41세의 나이에 대구성내에서 혹세무민의 죄를 쓰고 효수하고 말았다. 이후, 최제우가 세운 동학은 그의 뒤를 이은 2세교주 해월 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통일이전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축조된 첨성대는 동양에서 현존하는 천문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이다. 첨성대는 맨 밑부분에 정사각형의 평면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몸체는 원형의 평면에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화강석을 층을지어쌓으면서도위로 올라가면서는 유연한 S자 곡선을 이루어 원통형이 아니어서동적 긴장감속에균형을 잡고 있다. 또아랫부분에서는 체감이 없이 올라가다 차츰 줄어들어높이의 2/3쯤에서는 지름이 가장 작은 원형으로 되었다가 다시 그 원이 커지고 있다. 현대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비례균형상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어,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원통의맨 위에는 2단의 장대석을 겹쳐서 쌓아 전체적으로 곡선과 직선의 균형속에 안정감이 잘 갖추어진 조형성이 뛰어난 구조물로 1,400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서있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전란 중에도 훼손되지 않았고, 경주지역에 발생했던 여러 차례의 크고작은지진에도 훼손되지 않았다. 최근 경주지역의 지진을 분석해본 결과, 윗부분의 2단 장대석이 없었더라면 그 균형감각을 잃고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는 실험결과도 있다. 석조구조물은 그 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현재 한국의 고찰 중 가장 그 격식을 잘 갖춘 절은 불국사다. 불국사는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땅에 바로 불국정토를 구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 창건하기 시작 하였고, 자신의 생애 동안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는 왕실에서 맡아서 완성했다.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생의 보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김대성은 젊은 시절 사냥으로 낙을 삼고 살다가, 그가 잡은 곰을 꿈속에서 본 뒤 인과의 법칙을 깨닫고, 자신이 저지른 살생의죄를 속죄하고, 전생의 부모에 대한 인연과 현생의 보모에 대한 감사를 갚기 위하여 불국사 창건에 일생을 바쳤다. 그런 불국사는 현존하는 한국의 다른 절에서는 볼수 없는 품격과 격식을 잘 갖추고 있는데, 그 품격과 격식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불국사의 주 불전공간인대웅전과 극락전의 주변이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궁궐인경복궁 창덕궁과 같이 주 정전 주변으로 복도인회랑을 잘 갖추었다는 것이다. 옛날 한국의 많은 고찰들은 대부분 이와 같이 회랑이 갖추어진 절들이었으나, 고려시대 이후조선시대에 들어서고 유교를 숭상하기 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의 천년 서울인 경주에서 30여 km 동쪽 해안으로 가면 동해 푸른 바다에 닿게 된다. 이곳을 우리는 감포라고 부른다. 감포(甘浦) 앞 바다에는 해안과 300m 거리에 가깝게 작은 바위섬이 있는데 바로 대왕암이다. 이를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서기681년 이곳에 신라의 문무왕을 모신수중릉이기에 그렇다. 신라 문무왕은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통일의대업을 이룩한 왕으로 신라인들은 추앙한다. 그가 대업을 이룩한 뒤에도신라의 해안가에는왜구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변방을 약탈하고 어민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신라왕실은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왜구들은 해안가를 돌면서약탈이 그치지 않았기에 문무왕은 자신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 신문왕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나를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감포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에 묻어다오. 그러면 나는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들을 모두물리치겠노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죽자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스님들처럼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석관에 고이 모셔 감포 앞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의 가운데를 다듬어 판 후 이곳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계 수많은 공항중에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어 최고의 공항으로 인정받은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영종대교 기념관이 있는 휴게소에 잠시 들러 주변을 둘러 보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몬래 바다가 인접한 갯벌로 지금도 썰물이면 갯벌이 들어나 아름다운 S자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인천공항을 들러 갈아타는 여행객들을 잠시나마 관광할 수 있는 많은 시설들도 들어설 것이라고 하니, 한국을 느낄 수 있는 첫 관문으로써 더욱 기대가 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면 눈세상이 되는 덕유산 설천봉 옛날에는 70년을 살아도평생동안 한번도 가기 힘들었던 골짜기 중의 골짜기를 이름하여 무주구천동골짜기라 하였으나,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왕복이 가능한 명소가 되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덕유산이 온통허얀 눈으로 덮여 그 이름도 설천봉은 온통 눈세상이 된다. 그런데 그 설천봉 북쪽사면에 스키장이 개발되어 추운 겨울을 오히려기다리는 스키어들이 새벽부터줄을 서고 있으니, 상전벽해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되었다. 새벽에 줄을 서 기다려 15분동안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설천봉에 내리고, 그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의 산길에는 나뭇가지 마다 하얗게 상고대도 피어나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설국에 온 느낌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014년 4월 16일 인천을 출발한 여객선 "세월호"는 남쪽나라 따스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어린 학생들과 일반 승객들을싣고 진도근처를 지나다 원인도 알수없는 사고로침몰하였다. 그리고 300명이 넘는 고귀한 생명들과 함께 깊은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 그 세월호에 탓던 생명들을 보호하고 구조해야할 의무가 있던 국가는 도데체 무엇을 하였는지 이를 책임진 세월호의 승무원과국가재난본부 해양경찰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채 그냥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였고, 순진한 승객들은 안내방송에 따라 구명조끼만 입고 있으면 곧바로 구조될 줄 알았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바다속으로 뒤집혀서 침몰하는 것을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기상악화와 무슨 원인에서인지 부딪혀 발생한 침몰사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왜 세월호는 그원인을 피하지 못했는지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밝혀야 원통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살아남은 유가족들은최소한의 부모형제로서의역할을 하는 것이고, 앞으로 또 다시 그런 재난이 생긴다 하더라도 사고를 피하고 혹시라도 다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신속하고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가 물속으로 침몰한지 1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에서 꼭 가보아야 할 명소 가운데 10손가락에 속하는 곳이 태안반도 '꽃지 해수욕장 할망 할방섬의 해넘이'다. 계절에 따라 해넘이 지점이 서남과 서북으로 오르고 내리며바뀌는 지라 해넘이 시간이 되면 꽃지의 할방 할망 바위섬과 어울리는 구도를 잡으려고사진가들은해가 내려앉을 포물선 궤적을 짐작하며꽃지해변에서,동서남북으로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자신만의 이상적인 구도를 생각하며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해가 구름속에 있느냐 아니면 달처럼 둥근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바다속으로 내려 앉느냐를 기대하면서 설레임으로 꽃지에 간다. 특히오후 기상이 맑은 날이라는 예보가 있으면 "오늘은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무거운 촬영장비를 챙겨서 오는 것이다. 오늘 일기예보를 보니중국에서 밀려오던 겨울철 미세먼지도 없고 날씨도 쾌청하다는 예보이고 보니 오늘은 오메가(일몰시 둥근 태양이 수평면에 막 닿은 순간수평면에 태양이 비치면서라틴어 오메가 [Ω] 모양이 잠시되는 순간)도기대할 만 하였다. 그런 예보를 미리 알고, 오늘은인근에 출장기회가 있어서 꽃지해변의 해넘이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꽃지해변에 석양이 기울때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태안반도에 있는 간월암(看月庵)은 태안군 부석면 간월도리라는 행정구역 주소를 가지고 있다. 간월암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고 하여 간월암으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만조가 되면 섬이 되고 썰물에는 육지가 되는 섬 아닌 섬, 하루에 2번은 섬이되고 또 2번은 육지가 되는 섬. 무학대사는 서해 바다와 접하고 있던 이곳에 작은 토굴을 짓고 수행을 하다가 문득 깨침을 얻었다고 한다. 푸른산 푸른물이 나의 참모습인데 밝은 달 맑은 바람의 주인은 누구인가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이르지 마라 온 세상 티끌마다 모두가 부처님 이러니 - 무학대사 오도송 - 이렇게 역사가 시작된 간월암은 무학대사 이후 조선불교의 쇠락으로 폐사가 되었다. 그리고 500년 가까이 흐른 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도 깊이 참여하고 한국불교를 다시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던 송만공선사에 의하여무학대사 자취를 되살려 다시 중건하였다. 그런 연유로 간월암 대웅전에는 부처님과 함께 무학대사와 만공선사의 영정이 모셔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다가 접한 곳이고 보니, 바닷사람들의 안위를 보살펴 달라는 의미에서 용왕각과, 또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