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왕흥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백제의 절이다, 왕흥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2년 (서기600년) 공사를시작하여 무왕 35년(서기634년)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왕흥사지는 백제가 멸망한 뒤 불에 타 절의 전각이 사라지고, 이후 땅속에 묻혀서 잊혀진 절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옛 기록을 근거로 부여 근처를 수소문하여 절터로 추정된 곳에서 왕흥(王興)이라 쓰여진 기와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왕흥사터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 절의 전각이 목조로 되어있었기에,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절 내 가장 높이 솟아 있던 탑도 우리가 탑하면 떠오르는 돌로된 석탑이 아니라 목탑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탑의 흔적도 없었다. 당시에는, 석등 또한 돌로 만들지 않았었다. 사찰의 중심에는 등조차 목등이었기 때문이다. 발굴된 사리자엄구 겉에 쓰여진 글자를 해석해보면 577년 초기 "백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인 왕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어렵게 사리를 구하여 절을세우기 시작했다."고 쓰였다.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흥사는 백제 법왕2년*600년) 착공하여, 30여년의 역사 끝에 무왕 때에야 완성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고대 한민족 곧 부여족의 하나였던 백제인은 고조선이 분화되면서 생겨났던 북부여국에서 떨어져 나와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초기 백제국을 세웠다. 그 즈음 만주지역에 자리잡은 것은 고구려였다.백제는 졸본부여사람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세웠다고 하며, 그 시기는 기원전 18년 무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 정착지에 대하여 여러 이론이 있으며, 그 국가로서의 성립은 한강유역이었을 것으로 거의 확정하고 있다. 그 백체 초기유적이 현재 서울 송파구 와 하남시 미사리에 걸쳐 있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춘궁리 유적등이다. 그런 백제는 중국의 요동반도 서쪽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지배했었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 양서, 남사, 진서 등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백제는고구려의 남하에 밀려 475년 문주왕때 남쪽으로 밀려나 재기를 꿈꾸었으나,다시 재기하지 못하고서력기원 663년 백제는 신라가 끌어들인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공식적으로 그 나라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 때, 동아시아의 해상세력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두루 주름잡던 백제인들은 한반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곡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한민족은 그 바람 앞을 피해서바람불지 않는 굴속으로 도망치는 대신 작은 등불을 모아서 밝히고 태풍과도 같았던 역사의 현장에서 분연히 일어섰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서기1200년 당시 이미 그 누구도 대항해볼 엄두를 내지 않았던세계제국이 된 몽골의 기마병 앞에서 3차례끈질긴 저항으로수 십 년 동안 버티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도망쳐버린 임금과 관군을 대신하여 스님들과 뜻있는 선비들 그리고백성이 들고 일어나 싸움으로 평생을 살아오던 일본의 사무리이 정예군에 감히 맞서서 저항하였다. 그런 끈질기고 기백에 찬 백성들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이순신 장군이 천하명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12척의 전함만으로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승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조선 말, 세계정세에 눈 어두운 조선의 임금 이하 관료들이 나라의개혁은 커녕 자신들의 특권과도 같았던권력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을 때, 그런 나라를 살리고자 나섰던 사람은 다름아닌 한낱 민초와도 같았던 몰락양반최제우였다. 그는 본래 우리 민족에게 깊이 간직되어 있었던 고조선 이래 민본사상인한사상과 동양의 여러 종교 철학에 서양에서 유입된 서학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푸르던 산야의 초목들 중 사계절 늘푸른 상록수를 제외한 초목들은 이제몸통과 가지가 그대로 다드러난 초겨울이 되었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또한 한조각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라는 선사들의 선시가 귓가에 맴돌지만, 중생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조각 구름이 뭉쳐서 떠돌다 한줄기 빗방울이 되어 초목에 싱그러운 삶의 영양소가 되어도 주고, 그리고 남은 물들은 흘러내려 작은 갯가를 이루고 흐르다 절벽을 만나면 계곡에 폭포를 이루고, 끊임없이 흘러서강물이 되었다가 넓은 대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렇게 흘러가다 증발하여 다시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기에 지상의 생명체는 돌고 돌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연의 원리를 체득한 서양의 고대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이 있기에 모든 생명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조각 구름이 설악산에 부딛쳐 빗줄기가 되어서 설악산의 단단한 바윗돌들을 깎아내어 설악산이 이루어 졌다. 그리고 깎여 내린 바윗돌들은 물줄기에 씻기고 서로 부딛치면서 깨지면서작은 돌맹이를 이루는데 수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몽돌들의 계곡인 백담계곡의 돌들로 사람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교가 정착한 이래 한국은 전국 어디에나 명산 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절들이 들어섰다.그런 불사는신라시대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많은 절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중심지였던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중앙에 왕흥사등 큰절들이있었고,각 지방에는 지역의 호족들이 세력을 떨치는 곳마다. 방대한 절들이 있었다. 지방의호족들은 그 절들을 중심으로 지방의 토호세력으로 지역정권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지방 중심지의 절은개경의 중심절과 별로 다르지 않을만큼 큰 규모에 당당한 부처님을 모셔왔기 때문에 지방이지만 중앙정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 내보였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고려가 망한 뒤 조선조에 이르러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원주지방에 융성하던 절들이 수백년 억불의 시대를 지난 뒤에는자취를 땅속에 묻은채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갔고, 고려멸망후 500 년 지난 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하나 둘 세상에 다시 그 흔적을 들어내었다. 이때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역사적인 유적지를 뒤져 한국내 불교유적들을 발굴하고 땅속에 묻혀있던 수많은 청동제, 철제, 금동불보살들과 각종 불교용품 그리고 청자를 비롯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현정권의 실상을 알아버린 rn국민이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국정치의 잘못된 현실을 추측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추측을 말하면 이를 "찌라시"라며 폄하하면서 무시하고 유언비어 유포자라 단속하던 박근혜 정권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태블릿 피씨"가 공개되자 꿈속에서 잠자던 것처럼 지내오던온 국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한국 정치의 핵심에 서 주모자 격인 박근혜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며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광장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집회가 어느덧 5번째에 이르렀고, 그 회를 거듭할 수록 그 규모는 커지고 있다. 3회째인 11월 12일에는 광화문 광장에만100만명이 서울의 중심에 모여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이를 본 대통령의 처신을 1주일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이, 오히려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 구원의 반대시위대들이 한데모여서 대규모 시위로자신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국민들은 또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는 축제처럼다양하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버스 벽으로 싸인 대통령이 있는청와대 주변에 버스 창에는 시민들의 뜻은 담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청주시내에는 보기드문큰 절이 하나있다. 언뜻 보기에 모두가 새로 지은 전각처럼 보여서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내력을 알고 보니, 그리 호락호락한 절이 아니었다. 본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600년은 훨씬 더 되는 것으로보였다. 무심천 변에 위치하고 있는 절의 이름은 용화사인데, "용"은 고대 한국인의 사상속에서는 물의 신이고, 물은 옛날 말로 "미르"였다. 요즈음 국정을 농단하는 최순실이 만든 재단의 이름이 "미르"이기에 그 이름이 가치가 왜곡되었지만, 아무튼 미르는 물이고 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신령스러운 동물을 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고대 우리민족의 생각이었다. 또 하늘에 떠있는 은하수를 "미리내"라고도 했는데, 이는 너무도 멀리 있는 수많은 별들이 언뜻 보기에는 "하늘에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기에 이를 "미리내"라고도 했던 것이다.그런 의미를 가지고 미래에 이 세상에 다시 오는 부처님을 미륵불이라고 하였으며, 그 부처님이 온다면 이곳에 오시리라 생각하여 미륵불국토를 준비하고 세운 절이 바로 용화사이다. 청주 용화사는 1901년 고종시절 엄비의 꿈에 나타난 현몽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
ㅇ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마이산(馬耳山)은 산의 모습이 말의 귀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마이산은 본래 바다밑에 돌맹이들이 굴러다니다가 굳어져 바위가 되었고, 그 바위암반이 수억년의 지각변동으로 차츰 차츰 땅이 되더니이제는 한국의 남부지방 진안고원의 중심에 우뚝 솟아난 산이 된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마이산이지만, 그 주변이 온통 험한 산지인지라 농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늘 살기에 힘들었다. 그런데 마이산에 이갑룡(1860~1957)이라는 사람이 살면서평생을 쌓은 돌탑이 있은 후 마이산은 전국적으로유명하게 되었다. 이갑룡 처사는 조선의 말기 외세들이 넘보던 때인25살 되는 해(1885년) 뜻한 바가 있어 입산수도하게 되었는데, 수도를 마친후 산신령의 계시를 받아평생동안 공을 들여 이곳 주변에서 얻은 돌들을 모아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작은 것은1m 정도부터 큰 것은 10m에 이르는 높은 탑까지 시간만 되면 돌을 주워다 하나씩 쌓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곳 마이산 계곡에는 120여개의 돌탑이 쌓여져 사람들이 찾게 되었고, 이제는 마이산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명물이 되었다. 그렇게 쌓은 탑은 대부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구석 구석에는 역사의 자취를 간직한 많은 절들이 있다. 그 어느 곳이나 산좋고 물맑은 곳이면 또 어김없이 우리문화의 보배와도 같은 절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늘은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고즈넉한 절 비암사(碑巖寺)를 찾았다. 비암사의 역사는 한국의 모든 절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수난사에 빠짐없었던전란과 조선시대 500년탄압의 역사속에 그 정확한 내력조차 남기지 못하고 현재 남아있는 자취를 근거로 추측과 남겨진 절의 유물로 알 수밖에 없다. 비암사는 그 이름도 특이하다. 비암(碑巖}이라니 무슨 특별한 비석과 같은 바위가 있었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고, 절 종무소에 들러서 물어도 보았으나, 그 한자이름에 걸맞는 비석 같은 바위는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내를 돌아보고 막 나오려는데, 종무실장이 특이한 곳을 안내해 주었다. 그곳은 절의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토굴이었는데, 그곳에 특이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하면서 안내 해 주었다. 그 유래가 전하는시절은 정확하지 않지만, 먼옛날에 한 소녀가 절 안에 있는 삼층석탑에 새벽이면 스님과 함께탑돌이를 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가까워진 11월 덕유산이 품은 산골짜기 죽림정사를 찾았다. 불교에서 죽림정사는 남다른 뜻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혹독한 동토의 땅에서 설산수도를 거쳐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 그를 따르던 수도승단을 이끌고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수행자들은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있는 동굴과 같은 곳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아침에 일어나 마을 집들을 돌아서 커다란 밥그릇(바루)에탁발하여 받아온 음식으로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이런 열악한 시설에서 수도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긴 당시 마가다국의 돈 많은 갑부인수자타 장자는 그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쾌적한 곳에머물면서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에 최초의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는 전국을 뒤져 그런 곳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그가 택한 곳은 당시 왕의 아들이었던 기따태자가 소유하던 대나무가 숲에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수자타는 땅주인인 기따태자를 찾아가 그 숲을 자신에게 팔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 땅값으로 얼마를 주면 팔겠느냐고 물어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