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현정권의 실상을 알아버린 rn국민이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국정치의 잘못된 현실을 추측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추측을 말하면 이를 "찌라시"라며 폄하하면서 무시하고 유언비어 유포자라 단속하던 박근혜 정권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태블릿 피씨"가 공개되자 꿈속에서 잠자던 것처럼 지내오던온 국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한국 정치의 핵심에 서 주모자 격인 박근혜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며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광장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집회가 어느덧 5번째에 이르렀고, 그 회를 거듭할 수록 그 규모는 커지고 있다. 3회째인 11월 12일에는 광화문 광장에만100만명이 서울의 중심에 모여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이를 본 대통령의 처신을 1주일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이, 오히려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 구원의 반대시위대들이 한데모여서 대규모 시위로자신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국민들은 또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는 축제처럼다양하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버스 벽으로 싸인 대통령이 있는청와대 주변에 버스 창에는 시민들의 뜻은 담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청주시내에는 보기드문큰 절이 하나있다. 언뜻 보기에 모두가 새로 지은 전각처럼 보여서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내력을 알고 보니, 그리 호락호락한 절이 아니었다. 본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600년은 훨씬 더 되는 것으로보였다. 무심천 변에 위치하고 있는 절의 이름은 용화사인데, "용"은 고대 한국인의 사상속에서는 물의 신이고, 물은 옛날 말로 "미르"였다. 요즈음 국정을 농단하는 최순실이 만든 재단의 이름이 "미르"이기에 그 이름이 가치가 왜곡되었지만, 아무튼 미르는 물이고 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신령스러운 동물을 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고대 우리민족의 생각이었다. 또 하늘에 떠있는 은하수를 "미리내"라고도 했는데, 이는 너무도 멀리 있는 수많은 별들이 언뜻 보기에는 "하늘에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기에 이를 "미리내"라고도 했던 것이다.그런 의미를 가지고 미래에 이 세상에 다시 오는 부처님을 미륵불이라고 하였으며, 그 부처님이 온다면 이곳에 오시리라 생각하여 미륵불국토를 준비하고 세운 절이 바로 용화사이다. 청주 용화사는 1901년 고종시절 엄비의 꿈에 나타난 현몽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
ㅇ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마이산(馬耳山)은 산의 모습이 말의 귀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마이산은 본래 바다밑에 돌맹이들이 굴러다니다가 굳어져 바위가 되었고, 그 바위암반이 수억년의 지각변동으로 차츰 차츰 땅이 되더니이제는 한국의 남부지방 진안고원의 중심에 우뚝 솟아난 산이 된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마이산이지만, 그 주변이 온통 험한 산지인지라 농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늘 살기에 힘들었다. 그런데 마이산에 이갑룡(1860~1957)이라는 사람이 살면서평생을 쌓은 돌탑이 있은 후 마이산은 전국적으로유명하게 되었다. 이갑룡 처사는 조선의 말기 외세들이 넘보던 때인25살 되는 해(1885년) 뜻한 바가 있어 입산수도하게 되었는데, 수도를 마친후 산신령의 계시를 받아평생동안 공을 들여 이곳 주변에서 얻은 돌들을 모아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작은 것은1m 정도부터 큰 것은 10m에 이르는 높은 탑까지 시간만 되면 돌을 주워다 하나씩 쌓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곳 마이산 계곡에는 120여개의 돌탑이 쌓여져 사람들이 찾게 되었고, 이제는 마이산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명물이 되었다. 그렇게 쌓은 탑은 대부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구석 구석에는 역사의 자취를 간직한 많은 절들이 있다. 그 어느 곳이나 산좋고 물맑은 곳이면 또 어김없이 우리문화의 보배와도 같은 절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늘은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고즈넉한 절 비암사(碑巖寺)를 찾았다. 비암사의 역사는 한국의 모든 절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수난사에 빠짐없었던전란과 조선시대 500년탄압의 역사속에 그 정확한 내력조차 남기지 못하고 현재 남아있는 자취를 근거로 추측과 남겨진 절의 유물로 알 수밖에 없다. 비암사는 그 이름도 특이하다. 비암(碑巖}이라니 무슨 특별한 비석과 같은 바위가 있었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고, 절 종무소에 들러서 물어도 보았으나, 그 한자이름에 걸맞는 비석 같은 바위는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내를 돌아보고 막 나오려는데, 종무실장이 특이한 곳을 안내해 주었다. 그곳은 절의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토굴이었는데, 그곳에 특이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하면서 안내 해 주었다. 그 유래가 전하는시절은 정확하지 않지만, 먼옛날에 한 소녀가 절 안에 있는 삼층석탑에 새벽이면 스님과 함께탑돌이를 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가까워진 11월 덕유산이 품은 산골짜기 죽림정사를 찾았다. 불교에서 죽림정사는 남다른 뜻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혹독한 동토의 땅에서 설산수도를 거쳐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 그를 따르던 수도승단을 이끌고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수행자들은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있는 동굴과 같은 곳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아침에 일어나 마을 집들을 돌아서 커다란 밥그릇(바루)에탁발하여 받아온 음식으로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이런 열악한 시설에서 수도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긴 당시 마가다국의 돈 많은 갑부인수자타 장자는 그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쾌적한 곳에머물면서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에 최초의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는 전국을 뒤져 그런 곳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그가 택한 곳은 당시 왕의 아들이었던 기따태자가 소유하던 대나무가 숲에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수자타는 땅주인인 기따태자를 찾아가 그 숲을 자신에게 팔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 땅값으로 얼마를 주면 팔겠느냐고 물어보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잠들었던 국민들 !!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일텐데... 잠에서 깨어나이제야스스로 주인임을 깨달았다는 듯, 100만 시민이 서울 한 복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모여든 사람들은 남여노소 가릴 수 없었고, 가족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민주국가의 주인임을 교육하는가 하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입시공부에 시달리기만 하던 중고생들까지 서울 한복판광장을 가득 메웠다. 자신들이 뽑아준 것은 공주가 아니고 대통령이며, 대통령은 군림하려 하지 말고, 이제뽑아진 국민의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점심 무렵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국민들은 4시 무렵에는 시청앞 서울역 종로 을지로 서대문 동대문 숭례문까지 가득했으며, 최종 집회 중심인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6시 쯤에는 광화문광장부터 시청앞 숭례문 서울역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단 한건의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아, 세계의 어느 시위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평화적이고 모범적인 시민들이 자신들의의사 표현을 하였고, 평화의 촛불을 켜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확실히 하였다. 오랫동안의 집회 중에는틈틈히 가수들이 오늘 모임을 함축한의미있는 노랫말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성은 약하다고한다.하지만 반드시갚아야 할 한이 있거나, 지켜야할 자식이 있다면 가녀린 나약함은 멀리가고 남성보다 더 강하게 변한다. 불굴의정신을 지닌 여성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잔다르크를 꼽을 수 있다. 그녀의 힘으로프랑스는 100년 전쟁에 영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와 못지 않은 인물을 한국에서 찾는다면 유관순을 비롯한여자 의병장윤희순 등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들 수 있다.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치욕의 임진왜란시절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을 위해자신이 사랑한 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면서 죽어간 여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논개다. 그는 갔지만 그의 거룩한 생애를 추모하고자 그가 태어났던 곳에혼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이 장수읍내에 있는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祠)다. 의암이란 그가 진주 남강에 뛰어들 때 왜장을 껴안고 뛰어내린 바위의 이름이고, 이를 그의 사당이름에 붙인 것이다.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는 그가 의롭게 죽은지 365년 만인 1955년 세워졌다. 300년이 넘도록 사당도 없이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과 그녀의 무덤만이 있었던 것을 1955년 그의거룩한 뜻을 더욱 추모하고자 의암사를 세웠고, 이후1974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군위군 부계면 팔공산 자락에자리 잡은 또 다른 석굴암이 있다. 이 석굴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절벽 위에 자연동굴을 이용하여그 안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한국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본래 석굴사원은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행자들은 무소유를 실천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였고, 그런 까닭에 오로지 수행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되었다. 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집도 자연동굴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옷은 중요부위만 가릴 수 있는 긴 한장의 천이면 되었으며, 음식은 아침 일찍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7집을 거쳐서 정성껏 시주한 음식을 받고 수행처로 돌아와 서로 받아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 하루한 번의 식사로 대신하였다. 그런 전통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석굴사원으로 수 백 개의 동굴로 이루어진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이 유명하지만, 이밖에도 크고 작은 많은 석굴사원들이 여러곳에 산재해있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된 뒤에 중국에서도 많은 석굴들이 조성되었다. 중국에는 둔황의천불동(일천개의 동굴이 있다는 뜻)을 비롯하여용문석굴 운강석굴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인도와 중국의 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깊어가는 가을, 갑자기 닥찬 한파와 대통령을 둘러싼 국정의어수선한 국내정치상황 속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민족의 통일염원을 안고 파주 임진강가 안보관광지인임진각과 비무장지대 땅굴을 둘러보았다.임진각은 경기도 파주 임진강 바로 앞에 자리 잡아남한에서는 최북단이지만 북한지역으로 간다면, 임진각은 북녘으로 가는 최남단 길목이 된다. 얼마 전 미국으로 이민간 친지가 30년 만에 조국을 찾아왔다. 한국의 발전상만을 보기보다는 해외에 있다보니 오히려한민족 통일의 염원과 분단의 현실을 한국내에서보다 더 뼈저리게 느낀다기에, 기자는 그 현장을 찾아 이번에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으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오랫만에 친지와 함께가본 임진각에는 여전히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30년 전에는 젊음을 불살라 이국땅에서한참 열심히 일하여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지만 세월의 흐름에는 예외가 없어서이제는 노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임진각은 명절이면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과 그의 자손들이 뻥뜷린 자유로를 가득 메우고 찾는 곳으로 자유로 왕복 10차선이 좁을 지경이 된다. 기자가 찾은 날은 명절연휴는 아니었기에 그리 붐비지는 않았지만, 북녘을 그리는 사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한산성에 남아있는 유일한 장대(장수가 올라서서 명령ㆍ지휘하던 대)이다. 본래는 남한산성에5개의 장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수어장대만 있다. 인조 2년 서장대라고 하여 1층으로 지었던 것을 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에 따라 2층으로 짓고 그 이름도 수어장대로 바꾸었다.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인조가 겪었던 8년 동안의 병자호란의 시련과 그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갔던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며 잊지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별칭을 부여하였다. 이 무망루 현판은 영조가 쓴 친필로현판은 보호각에 보관하고 있다. 수어장대 바로 아래에는 청량당(淸凉堂)이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조선왕조 시절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을 축성책임을 맡았던 이회와 그의 처첩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당시 이회는 공사는 게을리 하면서 경비는 탕진한다는 모함을 받고 그만 억울하게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는 성벽을 쌓는데 최선을 다했고, 그의 처첩은 삼남으로 내려가성벽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던 중, 남편 이회가 모함으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