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도쿄의 무더위 속에서 긴자에 나간 김에 납량특집 가부키 1막을 보았다. 가부키(歌舞伎)는 전체 공연 가운데 1막씩만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든지, 전부 소화하기 어려운 외국인들에게 특히 1막짜리는 인기가 있다. 가부키는 전체를 다 보려면 보통 3~4시간 공연에 1만 5천 엔부터 2만 엔 정도 하지만 1막의 경우는 1천 엔~2천 엔 정도다. 가부키(歌舞伎)는 말 그대로 노래와 춤으로 이뤄진 일종의 연극인데 그 역사는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시대가 가고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이래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전쟁놀음에서 해방구를 찾기 시작했고 때마침 귀여운 꼬마 아가씨 둘이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데서 유래한다는 기록이 있다. ▲ 도쿄 긴자거리의 가부키 전용극장 《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 1582)》에 따르면 가가(加賀)는 8살, 쿠니(國)는 11살 먹은 아동으로 춤 잘 추는 이 두 신동 구경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또 한 전승에 따르면 이즈모(出雲) 출신의 무녀(巫女) 오쿠니(阿國)가 이즈모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이은관이 누구보다 악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배경은 특히 서도소리의 장단이 불규칙적이어서 지도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고, 그 다음은 같은 노래라도 잔가락이나 시김새의 처리가 달라 함께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시김새란 식음(飾音)새, 즉 음을 꾸미는 모양으로 김치에 비한다면 양념과 같은 역할로 지역이나 지방에 따라 김치맛이 다른 것처럼, 음악에 있어서도 지방에 따라 독특한 맛이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은관은 서도소리의 악보화 문제, 기보의 체계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지난 주 이 난에서 하였다. 또한 이은관은 해마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까닭은 제자를 지도해야 본인도 공부를 할 수 있고, 아는 것도 자꾸 복습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이름이 알려진 젊은 소리꾼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은관은 제자를 가르쳐 3년이면 이수 시험을 치룰 자격을 주는 현 무형문화재 이수자 제도에 못 마땅한 심기를 들어내기도 하였다. 3년으로는 어림도 없
[그린경제/얼레빗= 도쿄 이윤옥 기자] 싸고, 맛있고, 빨리 나오는 음식점을 일본에서 꼽는다면 당연히 덮밥 집을 들 수 있다.일본말로는 돈부리라고 하는데 원래 돈부리(井)란 것은 덮밥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그릇에 밥이나 국수를 담고 그 위에 불고기를 얹거나 새우튀김을 얹거나 김치를 얹어 먹는 음식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불고기를 얹은 요리는 규동(牛井), 김치를 얹으면 기무치동(キムチ井)이라고 한다. 이러한 돈부리 집에는 스키야, 요시노야, 마츠노야 같은 체인점이 있는데 이들 음식점은 주로 역전 가까이에 있거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자리한다. 음식 값도 300엔부터 비싸야 600엔을 넘지 않아 샐러리맨들에게는 인기 음식점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곳에서 근무할 일손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식당 뿐 아니라 건설현장 같은 곳에서 일할 사람이 딸린다고 아우성인 것이다. 식당 같은 곳은 거의 알바생이 주류를 이루는데 식당의 경우 임금은 대개 시간당 900엔 전후이다. ▲ 싸고 맛있고 빨리 나오는 일본의 덧밥집 스키야, 일손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사원전원이 평등하게 주 2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엔 전쟁 때에도 이은관은 명동성당에 숨어서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성당을 이용하는 이유는 유엔군이 예배당은 폭격하지 않기 때문이란 점, 전쟁 뒤에도 그는 지방공연이나 대형 쇼 공연을 통해 인기를 얻어서 배뱅이굿 영화까지 찍었으며 아세아 영화제에 참석하였다는 점, 그 후에도 일본, 미국, 월남, 등 해외공연이나지방 공연 등에 이은관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는 점, 배뱅이굿을 부르는 사람이 이은관, 이은관이 부르는 소리가 바로 배뱅이굿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점을 얘기했다. 그 바람에 문화재도 다른 사람들보다 10여년 후에 인정을 받았다는 점, 문화재가 된 후에는 해외나 지방공연을 자제하며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우렸다는 점, 그래서 학원을 세우고 젊은 소리꾼들을 모아 서도소리며 배뱅이굿을 지도하는 한편, 신민요나 창작 민요를 작사 작곡하기 시작하였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은관은 악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악보를 통해서 그가 배운 노래들을 악보화 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다른 지방의 소리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서도지방의 소리는 장단이 불규칙적이어서 지도하는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경진(庚辰) 25일 황태자가 성인식(원복-元服-이라함)을 했다. 14살이며 성무왕(聖武天皇)이다. 이날 조정에서는 대사면을 했다.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사면이 이뤄졌으며 신분도 묻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이날을 기해 100살이 넘은 사람에게는 곡식 5말을, 90살 이상인 자에게는 3말, 80살 이상인 자에게는 1말을 하사했으며 효자와 절부(節婦)는 마을 입구에 비를 세우고 종신토록 조세를 면제했다. 또한 과부나 홀아비, 독거노인, 중병환자들에게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필요한 물건을 하사했다.고 《속일본기, 續日本紀》는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원명왕 (재위 707~715)때의 일이다. 《속일본기》에는 주로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위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요즈음처럼 이른바 특별사면을 했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뿐만 아니라 699년 11월에는 야마토 가츠라기노가미 마을에 사는 가모 씨가 1남 2녀의 세쌍둥이를 낳았다. 조정에서는 포와 면 그리고 쌀을 산모에게 하사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세쌍둥이는 희귀한 일이라 국가가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하다. 《속일본기》에는 세쌍둥이 또는 쌍둥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은 황해도 황주에서 이인수 선생께 배웠고, 서울 경기의 소리들은 서울에 와서 최경식 선생에게 배웠다는 점, 이은관은 전통사회의 소리꾼 중에서는 드물게 서양의 5선 악보를 볼 수 있는 소리꾼이었다는 점, 그가 5선보를 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나 계기는 6. 25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북 사람들이 넘어와서 남쪽 연예인들을 포섭하여 연예단을 만들고 군가나 사상적인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악보를 복사해 왔을 때, 한 여성이 악보를 보고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악보 배우기를 결심을 하였다는 점, 그래서 이병우나 형석희 씨, 그리고 연예단에 소속되어 있던 양악 악사와 성악을 전공하던 여학생, 피아노를 치던 여학생 등에게 시간이 나는 대로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뾰족당, 즉 명동성당에 숨어서 여러 명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의 음악인들이 함께 단체 안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연예단의 이름은 특별히 짓지 않았다. 주로 성당 내에 있으면서 연습을 하고 행사를 준비하고 그랬던 원인은 유엔군이 예배당은 절대 폭격을 안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린경제/얼레빗=김리박 시조시인] 정전협정(727)날 어이들 잊을소냐 끔찍했던 그 세 해를 흰둥이 밭얼뜻에 피 흘린 슬픈 겨레 한배검 되살아나면 무엇이라 탓하실지 * 밭얼뜻 : 외래사상(外來思想) * 한배검 : 단군 할아버지 1953년 7월 27일. 이날은 끔찍했던 동존상잔 6.25전쟁에 끝맺음을 하는 날이었다. 이날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군 최고 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협정문에 최종 서명, 협정이 발효되면서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이 중지되었고 이로부터 한반도는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6.25전쟁은 동족상잔으로 비칠 수 있지만 멀리 국제정세로 살펴보면 제국주의 싸움에 우리 겨레가 휘둘려 엄청난 피해를 본 전쟁이다. 어쨌든 남북의 한겨레가 서로 총부리를 겨눈 이 안타까운 일을 두고 단군 할아버지가 되살아나시면 무어라 우리를 탓하실지? 이제 우리는 다시 6.25전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분명한 자주정신으로 나라를 지켜야 할 터이다. ▲ 한려연안, 그림 운곡 강장원저렇게 아름다운 겨레의 땅이 외세에 짓밟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 김리박 : 대한민국 한글학회 일본 간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도쿄 시부야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그 복작대는 시부야 역 앞 작은 공원에 충견 하치의 동상이 서있다. 시부야 역의 하치 동상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으로 어제 찾은 하치동상 앞에는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그 가운데는 하치의 모습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이 날도 하치는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충견 하치는 1923년 일본 북부 아키타현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아키타견(秋田犬)으로 한국의 진돗개만큼이나 뼈대 있는 족보 출신이다. 태어난 이듬해 충견 하치는 개를 좋아하는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교수인 우에노 씨 집으로 오게 된다. 우에노 교수는 하치에게 꼬리표를 달아 화물열차 편으로 아키타에서 도쿄까지 실어 오는데 무려 20시간의 긴 여행길 이었다. 이때부터 하치는 우에노 교수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대우 받으며 무럭무럭 크게 되는데 충견 중에 충견인 만큼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뼈 속까지 느끼게 된다. 우에노 교수 집에는 하치 말고도 죤과 에스라는 개가 있었는데 유독 하치만은 주인의 출퇴근 시에 현관에서 배웅을 했으며 어느 날 부터인가는 주인이 이용하는 시부야 역까지 마중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신불출과 함께 종로의 제일극장에서 배뱅이굿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이은관은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당시 신불출은 유명세를 타던 인물이어서 관공서에서도 그를 귀빈으로 접대할 정도였다는 이야기,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대한국악원의 회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6,25 때에는 군인들을 위한 위로의 공연을 장소팔, 고춘자 등과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이은관은 60년대 고려영화사에서 기획한 배뱅이굿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레코드판이 동시에 잘 나가는 바람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또한 국악인으로는 드물게 �스폰이나 아코디언과 같은 악기도 잘 다루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그 스스로 악보를 읽을 수 있었기 에 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실은 또한 그의 음악적 욕구나 역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이야기 등을 진행하였다. 38선이 가로 막히지 않았을 당시에는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을 황해도 황주에 가서 이인수 선생께 배울 수 있었고, 선생의 추천으로 황해도 장연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프로로 살기 위해 수시로 배웠는데, 그렇다면 경기의 소리들은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도쿄의 한 여름은 한국의 무더위 보다 더 덥다. 그것은 일본의 습도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더위는 나무 그늘에 가면 어느 정도 식지만 도쿄의 무더위는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너무 덥다보니 자기 자신보다도 가족이나 친지가 생각나는 것일까? 그런 증거가 바로 무더운 여름날 일가친척과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름 하여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한다면 무더위 안부 편지라고나 할까? 쇼츄미마이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직접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편지는 대개 엽서를 보내는데 엽서에는 파도치는 그림이라든가, 시원한 계곡 그림 등이 그려져 있어 엽서를 받는 사람이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게 한다. ▲ 무더위 안부 편지용 엽서 카모메메루 (かもめ~る)광고 일본우편주식회사(日本郵便株式會社)에서는 이 시기를 특별 엽서보내기 기간으로 정하여 1950년부터 쇼츄미마이용우편엽서(暑中見舞用郵便葉書)를 발행하고 있다. 또한 1986년부터는 엽서에 복권 번호처럼 번호를 새겨 넣어 당첨되면 상품을 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무더위 안부를 묻는 쇼츄미마이 엽서 이름을 카모메메루 (かもめ~る)라고 하는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