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지난주에 이어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즉흥음악의 선두주자였다는 점, 음악적 재기(才氣)를 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는 점, 17살에 KBS 목포방송국의 전속악사로 있으면서 퓨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명인명창들의 음악인생을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을 탄탄하게 만들어 왔다는 점들을 이야기 하였다. 그 다음 추모의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 고 백인영 명인 추모공연에서 명인들이 함께 연주한 시나위 합주 백인영 선생! 지상파 방송을 통해 국악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연예와 오락, 그리고 사극(史劇) 드라마의 반주음악이나 영화음악에 있어서도 당신의 아쟁이나 가야금 소리는 빠지지 않았지요. 아니 빠지게 되면 극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오. 당신이 구슬프게 문질러 대는 아쟁소리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고 가야금 12줄이 희롱하는 소리에는 여인들의 고달픈 삶이 녹아 있어서 많은 사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오늘은 한글이 태어난 지 567돌을 맞는 날이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글자인 가나(仮名)는 언제 생겨났을까?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한글보다 훨씬 이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충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 공문서에서 오늘날 글자와 같은 형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가나(仮名) 탄생을 나라시대로 잡기도 하는데 그러나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재미난 것은 글쓴이가 대학에서 일본어를 처음 접하던 37년전 만 해도 일본의 가나(仮名)는 10세기에서 12세기에 생겨난 글자라고 배웠는데 오늘 이글을 쓰려고 '가나의 역사'를 찾아보니 일본 위키피디어에서는 이보다 훨씬 앞선 나라시대로 잡고 있다. 여기서는 2세기 곧 200년이나 앞서 생긴 글자라고 쓰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또 언제 가나(仮名)의 역사가 바뀔지 모르겠다. ▲ 기노츠라유끼(紀貫之)의 토사일기로 서기 935년 무렵의 가나글자다. 만든 이와 창제, 반포일이 확실하지 않기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 가나의 최초 모습이라고 들고 있는 것은 정창원(正倉院) 소장의 공문서이다. 여기에서는 다(多)라는 한자를 현재 일본글자인 다(夕)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주에는 소리판을 펼치게 된 경서도 소리의 간판, 최창남 명창 이야기를 하였다. 나이 80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는 한창 때 최창남씨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멤버들이 공연에 참가한다고 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흥행이 안 된다는 증언을 해 주었다. 19세에 벽파 이창배 문하에 들었는데 그는 경서도 소리에 알맞은 맑고 구성진 목과 넓은 음역, 기교나 표현력이 특출나서 수료와 더불어 보조강사로 채용되었다는 점, 타고난 목과 강유(剛柔), 명암(明暗),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현란한 기교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그의 영역이어서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리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기로 한다. 그는 가야금과 아쟁의 명인이었으나 지병으로 작년 가을 고인이 되었다. 그의 타계 1주년을 기리며 제자들과 선후배 음악인들이 1013년 10월 13(일) 오후 5;00시에 대치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에서 추모음악회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일본의 가게나 식당 입구에는 노렌(暖簾, のれん)이라는 헝겊으로 된 발을 걸어두는 풍습이 있다. 노렌에는 기업 이름, 가게 이름, 가문(家紋, 집안 무늬) 따위를 새겨두는 데 원래 이것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또는 직사광선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문을 열어두었을 때 가게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가게 입구에 늘어뜨린 발과 같은 구실로 쓰기시작 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전후에는 밥집이나 포장마차 등에서 손님이 나가면서 이 헝겊에 손을 닦고 나가기도 했는데 노렌이 더러울수록 번성하는 가게라는 인상을 손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식당이나 가게 등에 걸린 노렌은 영업중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노렌이 걸렸으면 영업중이요, 노렌이 없으면 영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 여러가지 노렌이 걸린 일본의 가게들 이러한 손님과 무언의 신호장치인 노렌문화가 한국에는 없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바쁜 점심을 마치고 저녁 영업사이에 잠시 쉬고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미안한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 종업원들이 고된 식당일에 잠시 쉬는 달콤한 휴식시간을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2013년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게 된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로움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전통을 잊지 않고 충실히 지켜가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지닌 명창이란 점, 그는 산타령의 예능보유자이며 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연창하는 소리로 답교(踏橋)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란 점,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 말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이 총 동원되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계약이나 흥행이 어려웠으며 공연이 끝나면 팬들이 최창남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구한말 유명했던 선소리패들은 이태문의 뚝섬패, 이명길의 왕십리패, 권춘경의 동막패, 소완준의 과천패, 그 외에도 성북동패, 쇠붕구패, 아오개패, 진고개패, 방아다리패, 배오개패, 자하문밖패 등이 있었다고 하나 변화의 물결에 밀려 전문적으로 부르던 소리패에 의한 연창(演唱)은 이미 맥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 따르면 고종 때의 명창으로 뚝섬패의 이동운이 있었는데, 그의 선생이 그 유명한 이태문이었고, 이태문의 선생이 신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첫해는 이런 식으로 그럭저럭 지나가고 이듬해는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고 기대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는커녕 기근에다가 전염병까지 번져 더욱 비참해지고 결국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굶주려 지쳐서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절박한 상황에 빠지니 비유하자면 왕생요집에 적혀 있는 메말라 가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물고기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중략) 시체 썩는 냄새가 교토 시내에 가득하였고 썩어가는 시신의 모습을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었다. 교토 시내가 이런 지경이었으니 하물며 가모가와 가장자리의 들판에는 온통 시체가 뒹굴고 있어 수레가 지나갈 틈도 없을 정도였다. 이는 천년 고도 일본 교토의 800여 년 전 모습으로 때는 서기 1205년! 50살의 나이로 출가한 가모노쵸메이(鴨長明, 1155-1216)가 58살에 지은 《호죠키(方丈記)》에 나오는 글이다.《호죠키(方丈記)》는 세이쇼나곤의《마쿠라노소우시(枕草子)》, 요시다겐코의《즈레즈레구사(徒然草)》와 함께 일본 고전문학의 3대 수필집의 하나로 인생무상을 읊은 수준 높은 작품이다. ▲ 가모노쵸메이 모습(왼쪽), 가모노쵸메이와 관련이 깊은 교토 시모가모신사 지금 히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우륵의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으려는 진흥왕과 이를 적극 말리는 신하들의 의견이 대립되는 장면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보통 임금이 아니었다. 가야는 망한 나라이고 가야금은 망한 나라의 음악이니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진흥왕의 악하죄호(樂何罪乎), 즉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이 한마디로 결판이 나 버린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야금은 기녀(妓女)들이 가까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까지도 가야금을 기녀들의 악기로 보려는 시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던 진흥왕의 존재가 곧 가야금의 오늘을 이어준 결정된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한 유능한 지도자의 능력이나 판단, 그리고 결단은 역사를 바꾸고도 남는다는 점을 알게 만든다. 잠시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에는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는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하겠다. 경서도 소리의 원로, 최창남(崔昌男) 명창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올해에도 제자들과 함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오늘은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다. 우리 겨레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혼인이나 아기의 돌잔치 때에도 떡을 해먹었다. 그런가하면 제사 때도 떡이 쓰였으니 떡과의 인연이 참으로 깊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떡과 관련한 속담이 많다. 귀신도 떡 하나로 쫓는다. 귀신 떡 먹듯 한다. 귀신에게 비는 데는 시루떡이 제일이다. 아닌 밤중에 웬 찰시루떡이냐? 귀신은 떡으로 사귀고 사람은 정으로 사귄다. 떡 본 귀신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떡 없는 제사에 절만 한다. 떡이 있어야 굿도 한다. 제사떡도 커야 귀신이 좋아한다. 떡시루 김이 오르기 전에 남이 들어서면 떡이 선다. 떡 찌다가 뒷간에 갔다 오면 부정탄다. ▲ 안동소주박물관에 전시된 화려한 떡들 이처럼 제사나 잔치 등 크고 작은 애경사에는 떡이 빠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귀신에게 공양하는 떡도 커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까 싶다. 떡은 곡식가루를 찌거나 삶아 익힌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문헌에 오른 떡의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시루떡(증병) : 곡식 가루를 시루에서 익힌 떡으로 시루의 등장과 함께 있어온 떡이다. 시루떡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백설기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한국은 오늘부터 한가위 연휴에 들어간다. 올해는 한가위가 목요일에 들어있는 관계로 앞뒤로 해서 5일의 연휴이다 보니 고향길 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울 듯싶다. 설과 한가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인에게 있어 크나큰 명절이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한가위 풍습은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도 우리의 한가위에 해당하는 오봉(お盆, 우리의 추석)이라는 날이 있긴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오봉을 양력으로 지낸다는 것이다. 일본은 명치정부(1868년)이후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한가위도 양력으로 지낸다. 둥그런 보름달과 무관한 한여름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양력 8월 15일이 이름하여 오봉(お盆)인 것이다. ▲ 마을 사람들이 모여 봉오도리를 춘다. 원래 오봉은 일본력(和暦)으로 음력 7월 15일에 조상신을 모시는 행사였다. 더러는 이를 불교행사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고신도(古神道)에서 행하던 조상공양 의식이 불교의 우란분(盂蘭盆)과 더해져서 오늘날의 오봉(お盆)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조상공양의 풍습이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오봉을 지내는 풍습은 지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가야국의 악사였던 우륵(于勒)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투항하게 되고 지금의 충주 지방에서 가야금을 타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탄금대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 그곳에서 진흥왕과 우륵과의 만나게 되었고, 법지와 계고, 만덕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 제자들은 선생의 음악이 번거롭고 음탕하다고 해서 5곡으로 편 작곡을 새롭게 하였다는 이야기, 우륵 선생이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다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낙이불류(樂而不流)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유명한 소감을 남겼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렇게 감동을 준 우륵의 제자들은 그 음악을 임금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전에 들었던 그 음악이 그대로 신라인들의 솜씨로 재현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왕; 하하하 정말 훌륭한 음악이오, 어떻소, 나는 이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으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임금의 의도와는 달리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의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신하; 아니 됩니다., 말도 안됩니다. 임금; 안 된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