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구로다니의 서운원을 연 종엄화상의 발자취를 찾아서- 교토 구로다니 (京都市 左京 黑谷町121)에 있는 서운원(西雲院, 사이운인)이 자리한 금계광명사는 일본 3대 문수도량으로 알려진 정토종 대본산 절로 이 절을 연 법연 (法然, 1133-1212, 호넨) 스님은 전수염불(專修念佛) 스님으로 널리 알려졌다. 전수염불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경전을 파고들기보다는 일심으로 염불함으로써 성불한다는 사상을 실천하는 일종의 염불불교이다. 수은주가 36도를 오르내리는 교토의 더위는 무덥다는 말보다는 살인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였지만 더위를 무릅쓰고 7월 15일 구로다니에 있는 서운원을 찾아 나섰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18살의 나이로 조선에서 끌려와 갖은 고생 끝에 큰스님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종엄화상(宗嚴和尙, 1575-1628)의 향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어째서 교토의 구로다니에 조선인 승려 종엄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일까? 《일본전사(日本戰史)》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장 오노기시게카츠가 종엄을 1593년 9월 일본군이 퇴각 할 때 끌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Ⅱ 지난주에는 30여 명의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원들이 중국 연변예술대학을 방문하여 열네 번째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 교류회를 했다는 이야기와 이 행사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동포들이 지키고 있는 음악을 상호 이해하고 서로 교류하는 행사라는 점을 소개하면서 올해의 발표내용과 발표자들을 소개하였다. 이 행사를 준비한 중국의 연변예술대학에서는 강광훈 학장, 신호 부학장, 김성삼 전학부장, 전화자 교수, 중국음악가 협회 박장수 주석, 표현전업의 리훈 주임, 최성룡 교수 등 그 외에도 여러 교수와 학생들이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그 중 리 훈 주임교수의 “중·한 교류음악회의 진정한 의미”라는 제하의 환영사 일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연변대학예술학원과 한국의 전통음악학회가 매해 여름에 만나 공동으로 개최하는 중한 학술 및 실연 교류회가 벌써 금년으로 14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에도 저희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찾아주신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장 서한범 박사님을 위시한 모든 가족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하나 되는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에 열매가 맺을 수 없는
오늘은 중복, 뉴스에는 온통 불볕더위 가마솥더위, 폭염, 찜통더위 같은 말들뿐입니다. 어제밤도 열대야로 고생하신 분이 많을 테지요. 이때 우리는 “더위사냥”을 합니다. 그런데 “더위사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이야 선풍기는 물론 에어컨까지 동원해서 비교적 시원한 환경 속에서 살지만, 예전 사람들은 더위가 심해지면 “이열치열”로 ”더위사냥"을 했습니다. 이열치열에는 음식으로 하는 이열치열과 일을 함으로써 다스리는 이열치열이 있지요. 먼저 음식으로 하는 이열치열은 뜨거운 삼계탕, 보신탕, 추어탕, 용봉탕(용 대신 잉어나 자라를 쓰고 봉황 대신 묶은 닭을 써서 만든 탕) 따위로 몸을 데워주어 여름 타는 증세를 예방해 줍니다. 그리고 일로 하는 이열치열은 양반도 팔을 걷어붙이고 김매기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밖에 옷을 훌훌 벗어버릴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 앉아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으로 위안을 삼았고, 백사장에서 모래찜질도 했지요. 그러나 여기 철학적인 더위사냥도 있습니다. 9세기 동산양개 선사는 제자가 더위를 피할 방법을 묻자 “너 자신이 더위가 되어라.”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닐
한국인들은 자신만의 비상금을 어디다 숨겨둘까? 한 보도에 따르면 모 은행 관계자는 "시골의 노인들은 아직도 용돈을 구들장에 보관하는 것 같다."라면서 "장판 밑에 눌린 돈을 새 돈으로 바꾸러 오는 분들은 어머니나 어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이라고 귀띔한다."라고 말했다. 또 주부들은 전자레인지에 비상금을 숨겨 놓는 사례도 발견됐는데 한 주부는 1만 원짜리 90장을 보관하던 전자레인지를 작동하던 중 돈에 불이 붙는 바람에 새돈으로 바꿔가기도 했다는 기사가 재미나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쌈짓돈이나 비상금을 어디다 숨겨둘까? 한국처럼 구들장이 없어서인지 그런 기사는 안 보이는데 일본말 가운데 헤소쿠리へそくり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비상금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 헤소(へそ)란 배꼽을 뜻한다. 예전에 헝겊에 돈을 싸서 배꼽둘레에 묶어두었음 직한 헤소쿠리에 대한 한 생명보험회사의 조사가 흥미롭다. 7월 5일 자 손해보험회사 제팬 DIY생명에서 조사한 전국 20~50대 샐러리맨 세대의 주부 500명에게 ‘2012년 여름 보너스와 가계 실태’를 주제로 한 설문을 실시한 적이 있는데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로 용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기소리의 중견 곽윤자 명창이 음반 출시를 했다고 한다. 평소 그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미국과 중국의 대학과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해 오고 있다. 겨울철에는 미국의 UCLA와 Korean Music Symposium 행사를 11년째 해 오고 있고,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는 중국의 연변예술대학, 그리고 조선족 예술단과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20여년 전부터 해 오고 있다. 이 행사에 국악계 여러 교수와 석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 인간문화재급 명인명창이나 이수자급의 실기인들이 동참해 주고 있다. 몇해 전부터는 선소리 산타령의 황용주 예능보유자 외 보존회 멤버들이 본 행사에 동행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곽윤자를 가까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연주여행을 함께 하면서 남들과는 다른 그녀만이 지니고 있는 인상에 남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는 그녀가 매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소리꾼이라는 점이다
"최 참판댁의 기둥 군데군데 초롱이 내걸려 있고 행랑의 불빛도 환하게 밝았다.”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초롱이라고 하면 왠지 귀여운 등불이 연상된다. 전기가 없던 시절 불을 밝히는 도구였던 초롱은 꽃이름에도 붙어 있는데 금강초롱이 그것이다. 꽃모양이 흡사 신랑신부 가마 타고 시집가던 날 들던 청사초롱 모양을 하고 있어 더욱 정겹다. 그런데 이 꽃이름의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로 이 꽃에 이름이 붙은 하나부사(花房義質, 1842-1917)는 25살 때 유럽과 미국을 순방한 경험을 토대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던 시기의 조선주재 초대 공사이다. 금강초롱은 1902년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근처에서 자생하는 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태백산·오대산·설악산·향노내봉·금강산을 거쳐 함경남도에서도 자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최근에는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에서도 금강초롱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 꽃에 하나부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하나부사의 한자는 화방(花房)으로 사람들은 여기에 초(草)자를 붙여 화방초라 불렀는데 금강초롱에 하나부사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일본의 식물분류학자인 나카이 타케노신(中
해마다 6월이면 부여에서 내포제 시조창 강습회가 열리고 있다. 때를 맞추어 문화재 보유자인 김연소 명창의 개인 발표회도 열리고 해서 시조를 좋아하는 전국의 애호가들이 부여로 발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내포제 시조란 내포지방, 즉 충청남도 서해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홍성, 당진, 서산, 서천, 보령, 부여, 청양, 연기, 논산, 예산 지역에서 부르고 있는 3장 형식의 간결한 노래선율을 말한다. 충청남도에서는 일찍이 이 내포제 시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초대 보유자는 고 소동규 명인, 2대 보유자는 고 김원실 명인, 그리고 현 보유자는 김연소 명인이다. 충남의 시조인들은《충남통합시우회》를 조직하고 보유자를 중심으로 내포제시조의 확산과 보급을 위해 해마다 시조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가을에는 전국적인 시조창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 중심에 김연소 명인을 포함한 이규환, 김영숙 등과 같은 열성있는 시조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충청 지역에 내포제시조가 전해오는 것처럼 경상도 지역에는 영제시조가 있고 전라도 지방에는 완제시조
지난주까지 벽파가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을 정리하면서 벽파는 민속음악, 그중에서도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었다는 점을 피력하였고, 둘째로 선생은 학문을 즐겨 한 학자였다는 점을 말했고, 셋째로는 앞서가는 국악교육자였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 벽파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선생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분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대 사범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름난 명인 명창 중에는 스스로 자기의 음악성을 자랑하거나 목자랑, 소리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위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지요. 오호의 결과나 평가는 듣는 사람들이 하는 법인데 스스로 자기 소리에 도취해 품위를 잃는 경우를 목격하게 됩니다. 같은 소리를 듣더라도 A가 부르면 천박해 보이고 B가 부르면 고상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실기인이라 해서 소리만을 앞세워서는 훌륭한 음악인으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진리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예술인인가, 아니면 쟁이인가? 하는 점이 본인의 인격이나 교양과 직결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벽파 선생은 여타 명창과는 다른 품격을 지니고
“ 1955년 7월,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는 인멸 위기에 있는 우리 고유의 가락들을 정확하게 보존전수하고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설하고, 일반인 및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동 학원에서는 일반 민요를 비롯하여 경기 및 서도의 입창 잡가 각 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교수하였고, 그 활동은 20여년 이상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간에 모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 학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고, 사사받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이곳을 거쳤다. 개원 당시만 하더라도 민요계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고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은 오류투성이로 전해질 뿐이었다. 어려운 고사나 한문구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불러 왔기 때문에 사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작업은 동 학원의 이창배 사범에 의해 하나 둘 정리되어 나
'착한 일본인 괴롭힌 한국인', 이 말에 삶이 바뀌었다 [대담] 독립운동가 오정화 애국지사 손녀, 아그네스씨의 '신 독립운동 이야기' 12.07.06 18:23 ㅣ최종 업데이트 12.07.06 18:23 이윤옥 (koya26) 아그네스안, 요고이야기, 신독립군 ▲ 미국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앞장서고 있는 독립운동가 오정화 애국지사의 손녀 한인 3세 아그네스씨. ⓒ 이윤옥 아그네스 안 지난3일 화요일 오전 11시 아그네스씨를 만난 것은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였다. 까만 원피스에 초록빛 스카프가 잘 어울리는 아그네스씨는 단발머리에 아담한 체구의 밝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우리였지만 그녀는 한복 차림의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방한 중인 아그네스씨는 미국 보스턴에서 외과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그가 건넨 명함에는 'Dr. Agnes Rhee Ahn' 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인 교포 3세인 아그네스씨를 알게 된 것은 여성독립운동가 오정화(1899.1.25~1974. 11.1) 애국지사 때문이었다. 오정화 애국지사는 아그네스씨의 할머니로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유관순 열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