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다. 그가 죽자 아들 수일(壽一)이 그 장서를 모아 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된다. 부자로 이어지는 문화재 약탈의 전승이다. 데라우치가 조선관련 문화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 취임 때부터이다. 그의 곁에는 책 전문가인 고도소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데라우치는 그를 조선총독부 내대신비서관(內大臣秘書官) 등의 자리를 주어 고서묵적(古書墨蹟)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규장각 등의 고문헌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군인 출신의 무식한 데라우치를 도와 고도소헤이는 값나가는 유구한 고서들을 데라우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데라우치문고 (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국악속풀이 46에서는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 박사의 논평을 통해서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이, 그리고 궁정음악, 즉 아악과 민속악의 차이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고 서양음악은 인공적인 것 같다.”는 그의 평가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제 유럽의 신문들은 한국음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음은 독일의 디벨트(DIE Welt)신문의 논평이다. “한국음악은 현대음악에 큰 위협을 느끼게 했다. 한국음악은 바로 현대음악이다. 500년 전의 종묘제례악이나 천년 전의 대취타(大吹打)가 바로 오늘의 현대음악이요, 그 본보기이다.” 이어서 프랑스의 르몽드(LE Monde)지와 르피가로(LE Figaro)지에 실린 기사를 보자. “우리 서구인들에게 이 신비로운 음악을 듣는다는 기쁨은 색채의 조화성과 아름다운 변화의 다양성을 맛보게 하여 황홀한 예술의 극치를 경험하게 하였다.” “전위 음악가들이 한국 음악을 들었을 때에 그들이 찾고자 하는 새로운 운율을 충족시켰을 것이며, 동시에 무
이외수 선생의 ‘닭도리탕=토박이말’에 한 표 [진단] 닭도리탕 어원도 모르는 한심한 국립국어원과 조선일보 이윤옥 최근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에 “닭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도 트위터를 통해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 'とり(새)에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닭볶음탕으로 다듬었다. 도리의 어원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밝혀 일부 언론에서는 이외수 선생이 망신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일본말찌꺼기를 연구해온 필자는 이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다음에 두 가지 쟁점으로 살펴 나눠본다. 쟁점(1) 이외수 선생이 주장하는 ‘도리=토박이말’에 대하여... 작가 이외수 선생은 일본말 도리(tori,とり)를 새(또는 닭 ‘니와도리지만 도리라고도 함')로 보지 않고 우리 토박이말로 보는 근거로 닭을 ‘도려내어(토막 쳐) 만든 요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 틀렸다기보다 이 말의 근거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닭도리탕을 만들려면 닭을 토막 내야 함은 상식이다. 통째로 인삼을 넣고 고아 먹는다면 삼계탕으로 간단히
조선일보는 구로다 망언 부추기지 말라 [논단] ‘오뎅’을 어묵으로 부르는 것이 어찌 ‘언어 내셔날리즘’인가 이윤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츠히로(黑田勝弘, 71) 씨의 조선닷컴 글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붓을 들었다. 조선닷컴(인터넷판 조선일보)에 소개된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의 애국자들은 오뎅이라는 일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뎅을 어묵꼬치로 바꿔 부르고, 일부 포장마차에서도 메뉴판에 그렇게 쓰고 있다.”며 상대가 일본이 되면 한국은 언어 내셔널리즘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이어 “와사비는 고추냉이로, 낫토는 생청국장이라고 바꿔 말해야 한다며 일본어를 거부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까다로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먹을거리에까지 일본을 트집 잡는 사람은 이제 옛날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담긴 글을 인용하여 “조선닷컴 토론장 2012-02-17”에는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러한 구로다 씨의 말은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제쳐 놓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언어 내셔널리즘’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구로다 씨의 한국인 추종자들을 위해 두 가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올해로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3돌이다. 그 뜨거운 함성으로부터 약 100년 가까운 세월에 이르고 있지만 한일관계는 매끄럽지 못하고 찜찜하기만 하다. 오만한 식민역사의 반성은커녕 일본이 한국땅 독도에 품은 검은 야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야 어찌 사이좋은 ‘이웃’임을 말할 수 있으랴! 지지난 주에 이어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문화재 약탈이야기를 모두 4회에 걸쳐 실어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오만의 역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3) -고려불화의 90%는 일본에 있다- “한국인들이 가장 간절하게 반환을 원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있다. 또한, 13~14세기 고려불화는 90%가 일본에 있다.” 위 이야기는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유실된 조선 문화 유산 -식민지 하에서의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공개 책 20쪽에 나와 있는 말이다. 이 책에는 구체적으로 약탈된 조선의 문화재 행방을 소개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문화재는 고
지금 국악속풀이는 한국전통음악이라는 항아리를 들고 세계의 유명 감정가들을 만나는 중이다. 지난주 46에서는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박사의 평가로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깝고, 서양음악은 더욱 인공적인 것 같다.”는 논평이었는데, 그 대표적인 음악으로 수제천을 들고 있기에 이를 소개하였다. 아악과 민속악의 차이뿐 아니라,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이도 명쾌하게 정의 내리고 있어서 참고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수제천이란 음악은 궁중음악으로 음향 자체도 매우 인상적이고 위엄 있으며 강렬하지만 진미를 알려면 여러 번 들어야 한다. 그 음악에 내재하여 있는 갖가지 음악적 요소도 특징적이지만, 일정치 않은 불규칙 장단 속에서도 많은 연주자가 하나같이 호흡을 맞추어 나가는 모습은 마치 물이 흐르고 바람에 구름이 움직이듯 자연의 형상 그대로라는 느낌이다.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이번 주 국악속풀이 47에서는 최창남의 공연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공연일시는 3월11(일) 오후 5시, 국립국악원 예악당) 중요무형문화재
국악이란 항아리를 들고 다섯 번째 감정가인 캠브릿지 대학의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박사를 만나 보도록 한다. “한국음악에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특색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등 매우 풍부한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범위한 감정 묘사가 있는 것이다. 궁중음악은 한없이 우아하고, 위엄 있고, 세련되고, 품위 있고, 진진하며 아주 아름답다. 반면에, 민속음악은 정서적이고 정열적이다. 궁중음악이 오랜 전통이 있듯이 민속음악 역시 뿌리깊은 전통이 있다. 차이를 말하자면, 민속음악은 더욱 대중에 침투되어 있어 처음 들을 때 이해하기가 쉽고, 반면에 궁중음악은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깊이와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수제천과 같은 음악은 궁중음악으로 음향 자체도 매우 인상적이고 위엄 있으며 강렬하지만, 진미를 알려면 여러 번 들어야 한다. 한국과 서양의 음악을 대비할 때 한국음악은 아주 느린 속도와 동시에 아주 빠른 속도를 갖추었는데, 서양에선 그렇듯 느린 것은 없다.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고 서양음악은 인공적인 것 같다” 컨디트 박사는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정악, 민속악 등 한국의 전통음악을 기초부터 공부하였고
일본열도를 뒤덮는 “히나인형”의 의미 슬슬 한 쌍의 인형이 일본열도를 뒤덮을 시간이다. 그 한 쌍의 이름을 히나인형(ひな人形)이라 부른다. 히나인형은 남자와 여자 형상을 한 부부금실이 좋은 원앙처럼 꼭 쌍으로 만드는데 그 재료는 실로 다양하다. 도자기의 고장인 아리타(有田)나 이마리(伊万里)같은 곳에서는 도자기로 만들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식으로 응용해서 창작 히나인형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비단옷을 겹겹이 입혀 헤이안시대의 화려한 왕실을 나타내기도 한다. 규모도 왕과 왕비를 나타내는 달랑 한 쌍의 인형을 만드는가 하면 층층시하 상궁과 하녀, 악사와 잘 차린 음식까지 표현한 히나인형도 있다. 인형을 즐기는 층도 다양해서 개인이 사다가 집에다 모셔 놓기도 하지만 호텔로비나 기념관 등에 대규모 히나인형을 전시하는 곳도 있다. 아예 웬만한 도시에서는 히나인형을 전시하는 기간을 한 달씩 잡고 전국 구경꾼들의 발걸음을 끄는데 이름하여 히나마츠리(雛祭り)다. 이날을 위해 수백 년 가업으로 히나인형을 만들고 만든 인형을 전시하여 마을을 관광도시로 만든다. 히나인형을 새겨 넣은 과자며 액세서리 소품을 만들고 앞다투어 히나인형을 활용한 이벤트를 여는 등 일본
지난주에는 일본음악 연구자로 매우 유명한 윌리암 맘(WillamMalm) 교수의 논평을 소개하면서 한국문화는 중국과 일본의 두 문화와 병행하여 형성되었다는 말의 배경을 음미해 보았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감정 결과였다. 그의 논평문에는 한국의 피리와 대금이라는 악기 이름이 나오는데, 피리의 종류는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가 있고 이들이 각각 어떤 음악에 편성되는가 하는 이야기도 해 보았다. 이번 속풀이 45에서는 대금이라는 악기의 소개부터 시작해 보겠다. 대금이라는 악기는 신라의 3죽 중에서 가장 굵고 긴 형태의 가로 부는 젓대 또는 저의 이름이다. 신라의 3죽은 대금(大) 중금(中) 소금(小)이다. 삼국사기 악지에 기록되어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때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떠다니고 그 산 위에는 대(竹)가 한 그루 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그 연유를 알아본즉,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2) - 오구라가 약탈해간 조선 유물들 -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게걸스럽게 긁어모은 한국의 값나가는 유물들은 그의 사후 보존회에 의해 보존되다가 1982년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유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 8점, 중요미술품 31점을 포함한 1,110점이다. 세목을 살펴보면 조각 49점, 금속공예 128점, 도자기 130점, 칠공예(漆工藝) 44점, 서적 26점, 회화 69점, 염색작품 25점, 토속품 2점, 고고시대 유물 557점이다. 시대별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고고유물(考古遺物)은 낙랑시대와 삼국시대의 고분출토품인 기와류와 통일신라시대의 귀중한 금속공예와 토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분출토품’이라는 말인데 고분이란 주로 왕릉이나 고대 통치자의 무덤을 말한다. 국보급 문화재를 싹쓸이해간 것도 용납할 수 없거늘 신성한 왕릉을 파헤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으니 그 패륜적 행위를 어찌 말로 다하랴!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 동경 고려박물관 발행》18쪽에 보면 “오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