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숲 사이에 핀 잔잔한 들국화 한 송이 꺾어 내려오는 쓸쓸한 저녁”-牟田口龜代- “북한산 산마루에 흰 구름 비추니 오늘은 맑겠구나” -久保靜湖- 위 노래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이치야마(市山盛雄) 씨가 펴낸 조선풍토가집에 나오는 일본의 단가(短歌)이다. 이 노래집에는 816명이 조선을 다녀가면서 읊은 노래들이 실려 있는데 온돌, 한약방, 주막, 고려자기, 무녀, 기생, 양반, 조선요리와 같은 조선의 풍속에 관련된 노래가 있는가 하면 쑥, 무궁화, 소나무, 작약, 조선인삼 같은 식물류와 까치, 학, 매, 뻐꾸기, 호랑이 같은 동물류도 노래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땅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노래로 기록해두고 있다. “내가 조선을 회고하건대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맑고 투명한 하늘의 아름다움이다. 그 중에서도 남선(조선을 남북으로 볼 때 남쪽)의 하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빛이다.”라고 와카야마(若山喜志子) 씨는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인상을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매력에 빠져 여러 번 조선 땅을 밟았다는 사람도 있다. 1936년이라면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 된 지 26년째로 조
그동안 농악에 관한 연구는 기원에 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승과정이나 실태에 관한 연구, 구성이나 판제에 관한 연구, 각 차(次)에 따른 기본형 리듬과 변형리듬에 관한 연구, 동작이나 춤사위 연구,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해서 상호 비교나 특징을 찾는 작업들이 활발한 편이었으며 상당수준의 연구성과도 축적되어 가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특히 농악의 리듬을 발췌하여 이를 무대음악으로 만든 꽹과리, 장고, 북, 징의 타악합주 사물놀이는 시연 3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미치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의 사물놀이 팀이나 평생교육원, 직장의 동호인 중심으로 점점 확산해 가고 있다. 이제는 농악의 외양이나 내면의 매력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농악 속에 어떤 미적인 가치가 있어서 한국인들은 농악과 더불어 긴 세월을 함께 해 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지방마다 전해오는 농악은 각각 어떤 독특한 멋과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한국 농악 속에 녹아있는 미적인 특징이나 농악
농악은 한국의 대표적인 향토음악이다. 그런데 농악의 기원을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옛날 삼국시대 이전에도 5월의 파종 후나 10월의 추수 후에는 천신, 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이 있었는데, 이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즐겼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농악과는 다르다고 해도 농사일과 관련하여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에서 농악의 시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가요인 동동의 후렴에 나오는 「아으 동동다리」라는 가사에서「동동」을 농악에 쓰이는 북소리의 의성어인「둥둥」에서 온 말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여튼 농악의 기원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농악의 기원설도 다양하다. 농사와 안택(安宅)을 위한 축원설이 있고, 농군을 훈련 양성하는 방안의 하나로 군악(軍樂)설도 있으며, 사찰건립이나 중수목적의 모금방안과 관련한 불교 관계설 등도 있다. 이중에서는 농사를 위하고 안택을 제신에게 비는 농사안택축원설이 농악을 하게
이이오겐시 씨가 쓴 “최을순 상신서” “재판관님. 저는 본국(한국)으로의 송환을 기다리며 오무라(大村) 입국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주부입니다. 본적은 조선 경상남도 함안군이고, 이름은 최을순(30세)이라 합니다. 제가 귀국(일본)에 불법 입국하게 된 것은 쇼와(昭和 32년, 1957년) 5월 열여섯의 나이였을 때입니다. 일본에서 살아온 남편이나 저, 그리고 제 부모님이나 형제가 귀국과 연관된 것들에 대해 재판장님께서 제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셨으면 하여, 반년 이상 살아온 수용소의 다다미방에서 썩 능숙하지는 않지만 일본어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 살의 최을순은 세 살과 한 살짜리 아기엄마였다. 180여 일을 눅진 다다미방에서 강제 송환이라는 절차를 기다리며 오죽 답답했으면 재판관에게 자신의 심경을 써 내려갔을까? 최을순의 변론을 맡은 시미즈 변호사는 이런 사건을 전적으로 도맡다시피 한 변호사이다. 그의 책상에는 언제나 수북하게 이러한 사연이 쌓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찡그리는 적이 없다. “독(毒)도 약(藥)도 되지 않는 외국인은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책이니까. ‘외국인은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자유’”라고 당당히 말하는
10월 22일 교토의 시대마츠리와 백제왕비 고야신립 10월 22일은 교토 3대 마츠리의 하나인 지다이마츠리(時代祭) 날이다. 화려한 고대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교토 시내를 두어 시간 행진하는 이날은 일본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느라 부산하다. 일본을 알려면 마츠리를 알아야 하고 마츠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교토의 3대 마츠리 중 하나쯤은 보아야 마츠리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라도 잡을 것이다.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에 당할 것이 없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다만,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가장 그 역사가 짧은 것은 지다이마츠리로 1895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116년 째를 맞이한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볼만하다. 헤이안신궁은 백제여인 고야신립이 낳은 제50대 간무왕(桓武天皇)을 모시는 사당으
엊그제 10월 9일은 565돌 한글날이었다. 한글을 만든 지 이만한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본문자인 ‘가나문자’는 언제 생겼을까? 나는 종종 일본어 첫 걸음마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일본문자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더러는 제대로 알고 답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개는 묵묵부답이다. 그럴 때 나는 객관식으로 고르라고 다음과 같은 문항을 만든다. ①에도시대 ②메이지시대 ③가마쿠라시대 ④헤이안시대 4지 선다형이라고 답이 쉬운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들은 일본문자가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답을 하는 학생도 있다. 메이지시대라면 1868년이다. 물론 정답은 헤이안시대(794-1192)이다. 한글처럼 만든 사람과 만든 날짜, 만든 목적이 뚜렷한 글자는 지구상에 없다. 영어도 그렇고 중국어, 일본어 또한 누가, 왜, 언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글날처럼 ‘가나의 날’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보통 가나의 출현을 10세기로 잡는다. 배우기도 어렵고 쓰기도 복잡한 한자는 일본인들에게 불편한 문자였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복잡한 한자의 획을 떼어버리고 편리한 부분만을 취해 둥글게 굴리기도 하고 눕히기도 하고 흘려 쓰기도 하여 만든 것이
충청남도 금산은 인삼의 고장이다. 매해 인삼축제를 열고 있어서 이 기간 중에는 국내는 물론, 동남아를 비롯하여 세계의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금산을 찾고 있다. 또한, 금산군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각 지방의 농악대를 초청하여 대대적인 농악공연을 계획해 놓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농악의 실기뿐 아니라 한국 농악의 미학이란 주제로 전국 국악학 학술대회도 준비하고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을 둔 학자나 연구자들, 그리고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실기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개최일시는 10월15~16일 양일간 충남 금산의 다락원 소공연장에서 오전 10부터 열릴 예정이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국악속풀이는 농악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언제 어디서 보고 들어도 한국인을 신명나게 해 주는 농악은 음악적인 요소뿐 아니라, 무용적인 요소와 연희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농악이나 농악무는 농사와 관련하여 집단노동을 할 때,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혹은 명절 같은 때에 흥을 돋우기 위해 연주하는 농민들의 음악과 춤인 것은 분명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를 ‘풍물’ 또는 ‘풍장’이라도 하는데, 풍물(風物)이란 말은 풍악에 쓰이는 기물을 말하는 것
흔히 오키나와는 춤과 노래의 섬이라고 한다. 일본 본토와 바다로 막혀 있는 지리적 조건, 아열대에 속한 자연환경, 또한 거듭 되는 외세의 풍랑을 겪어온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는 자연스레 무르익어 온 것이라고도 한다. 1609년 일본 사츠마번(薩摩藩)의 침공을 받은 이래 현재의 일본 행정구역 단위인 43개현(縣) 가운데 마지막 43번째 현이 되기까지 오키나와는 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중계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국가 류큐왕국(琉球王國)으로 번영하던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오키나와전(戰)이 벌어져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큰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1972년까지 미군정하에 놓이기도 했다. 그 뒤 일본에 복속된 지금에도 오키나와는 대규모 미군기지 시설이 들어서 있어 춤과 노래보다는 미군기지 땅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많다. 오키나와의 노래와 춤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섬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전통적인 춤과 노래의 출발은 마을신(神)에 대한 기원에서 비롯된다. 마을의 안녕과 재난을 막고 풍작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노래로 출발한 민속 예술은 사자춤, 봉오도리 따위가 있다. 이들 춤에 빼놓을 수 없는 악기로는 샤미센(三味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말 중에 전통(傳統)이란 말이 있다. 전통이란 무슨 말일까? 아마도 과거로부터 전해 오는 ‘문화적 가치’ 혹은 ‘유산’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은 과거의 모습을 급속하게 바꾸는 개혁의 사회가 된다거나 혹은 동시 다발적으로 흘러들어오는 외래문화를 만나게 될 경우, 두 얼굴의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하나는 전통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다. ‘오랜 전통은 지켜가야 할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쪽은 전통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통이야말로 ‘사회질서의 기반’이라고 믿고 있다. 반대로 과거의 양식은 고리타분한 관습이어서 우리사 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라고 보려는 시각도 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전통문화에 대한 국민의 긍정적인 인식이 점차 높아지는 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 중앙이나 지방의 국악계가 전례 없이 고무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경기소리 노학순 명창이 이끄
경북대 국악과의 정해임 교수가 이끌고 있는 고령의 ≪대가야 가야금연주단≫이 창단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창단 10주년을 맞아 그동안 축적된 연주단의 성장 모습을 보이고 평가와 함께 격려와 축하를 받는 기념 잔치를 열겠다는 것이다.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흘렀으니 연주단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들로서 음악사에 남을 굵은 선 하나 그리고자 하는 의욕이 어찌 없겠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지역 고령은 옛날 가야국이었다. 가야국 하면 제일 먼저 가야금이 떠오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가실왕이 나타나며 가야금을 잘 탔다는 악성 우륵선생이 연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우륵과 진흥왕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 있다. 가야국의 우륵이라는 악사가 가야금 한 틀을 가슴에 품고 신라에 들어가 매일같이 가야금을 타며 세월을 보낼 적에, 때마침 진흥왕이 이 음악을 듣고 계고, 법지, 만덕 등 3인에게 선생의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들의 음악이 어느 정도 익어갈 무렵 진흥왕은 좌우에 늘어선 신하들과 함께 감상하고는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펼치자 신하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대의 이유는 “망한 나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