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에 갔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든 영혼의 집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비탈진 언덕길 그의 집을 지키는 천 마리 학 누가 접었나 묻지마라 평화가 입으로 지켜지는 것이라면 누가 그 작은 색종이에 꿈을 접을까? 노랑 파랑 빨강 그리고 까망 암흑의 날 굴하지 않은 조선인의 투지 마사하루 목사 도와 천 마리 학 접던 고사리 손들 평화는 거기서 조금씩 싹터 오는 법 모진 편견 헤치고 홀로 비바람 막으며 용감히 부르짖었네 일본은 피해국 이전에 아시아에 끼친 해악을 헤아리라고 그를 기억해야한다 천마리 학들이 감싸안은 그 이름 오카마사하루. 조선인의 상처를 보듬은 재일조선인 인권 목사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전쟁이나 원폭의 비참함을 언제까지나 가슴속에만 새겨두면 안 된다. 이러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일본 측에 있으며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 일본 자신이 패전으로 받은 상처를 보듬기 이전에 아시아 이웃나라에 고통을 준 역사를 먼저 알지 않으면 평화는 절대 이룩되지 않는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었어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방치됐다. 가해의 역사가 숨겨졌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
한국에 판소리가 있다면 일본에는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둘 다 두 나라의 전통을 대표하는 예술이긴 하지만 둘의 성격은 다르다. 판소리가 큰 동작 없이 고수와 둘이서 소리를 하는 데 비해 가부키는 등장인물도 많고 춤과 노래와 연극적인 요소가 많다. 비슷한 점은 둘 다 공연 시간이 길다는 데 있다. 재미난 것은 가부키는 중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하는 점이다. 아무리 판소리의 중간 쉬는 시간을 많이 준다 해도 소리꾼은 물 한잔 먹고 목을 추릴 시간이고 관객은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인데 견주어 일본의 가부키는 막간에 먹는 도시락 먹는 재미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많이 다르다. 이때 먹는 도시락을 가리켜 마쿠노우치(幕の內)라고 하는 데 기모노를 입은 일본 친구와 가부키를 보러 가서 가부키 공연 중간에 도시락을 먹은 적이 있다. 그날 벤토(도시락)는 수수한 3,000엔짜리였고 가부키는 1등석이 1만 8천 엔이었다. 둘이 가부키를 보고 도시락 하나 까먹고 나오는데 1인당 2만 엔은 족히 써야 하니까 한국 돈으로는 26만 원쯤 된다. 물론 3등석이면 돈이 더 적게 들고 도시락도 주먹밥이면 더 싸게 먹히지만 더 비싼 도시락도 있다. 가부키(歌舞伎)는 말 그대로 노래
“지진 보도가 불안만을 부추기는 기사가 아니길 빈다.”라면서 마이니치신문 카고시마 지국장은 작가 오에겐자부로와 그 큰아들 이야기를 시작으로 ‘희망’을 말하고 있다.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에 이어 일본 문학사상 두 번째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오에겐자부로(大江健三郞) 씨는 큰아들의 뇌장애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오오에 씨는 한 강연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뇌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평생 아들은 말을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5살 때 일이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새 소리가 흘러나오자 아들이 평소와 다르게 눈빛을 반짝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그날 이후 각종 새 소리를 부랴부랴 녹음했다. 그리고 새 소리 뒤에 “참새입니다” “뜸부기입니다” “종달새입니다”라고 새 이름을 녹음 한 뒤 날마다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들을 목마 태워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목마 탄 아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뜸부기입니다” “종달새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5살이 되도록 한마디 말도 못하던 아들 입에서 비록 소통의 언어는 아니지만 “뜸부기입니다”를 되뇌는 모습에서 오오에
사상 유례없는 일본동북지방의 대지진 참사에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피해를 입은 분들의 조속한 복구를 기원합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 모두 드림- 지진사상 최악으로 기록되고 있는 일본열도의 재해를 가리켜 초토화니 궤멸이니 하는 말이 돌아다닌다. 진앙지와 가까운 동북지방의 피해는 인적 물적 피해를 포함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라니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시커먼 물기둥이 마을과 도시를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대자연의 재앙 앞에 인간의 한없는 무기력을 절감해본다. 한국 방송들도 첫날은 반복해서 악마와 같던 지진해일의 순간을 영상으로 보도하더니 점차 재해를 만난 사람들에게로 카메라 앵글이 집중되고 있다. 어느 나라든 지진 현장을 보면 상점가로 뛰어들어 물건을 훔치는 약탈자 한 두 사람 나오게 마련이고 어린아이 시신을 부여잡고 울고불고 하는 모습이 화면을 통해 보도되곤 하는데 견주어 일본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글을 쓴 사람이 있다. 대만의 왕영림(王榮霖) 씨가 그 사람이다. 그의 글이 차이나넷 일본어판에 오르자 이 글이 다시 3월 14일자로 일본전역에 타전되었다. “일본대지진에 보인 일본국민의 높은 민도(民度)”라는 제목의
봄철 불청객 화분증을 잡아라 한겨울이 지나고 봄철이 다가오면 일본 열도는 화분증(花粉症, 가훈쇼)으로 몸살을 앓는다. 일본인의 25% 곧 4명 중 1명이 화분증을 앓는다고 하는 일종의 알레르기성 비염증상을 보이는 화분증은 작년 여름 이상 고온현상으로 올해는 환자가 작년에 견주어 10배나 늘어 날 것이라고 한다. 화분증이란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식물의 꽃가루가 코나 눈 점막을 자극하여 재채기나 콧물, 코막힘, 눈병 등을 일으키는 일종의 질병이다. 화분증을 일으키는 식물은 60여종으로 알려져 있고, 주로 봄철에 화분증을 일으키는 식물로는 삼나무(스기)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노송나무, 국화꽃의 하나인 부타쿠사(豚草), 소나무, 쑥 등도 화분증을 일으키는 식물이다. 한국의 황사철이 되면 각 매스컴에서 황사 소식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마스크가 불티나게 팔리듯이 일본의 화분증 계절이 되면 신문, TV 등에서는 화분증 대책으로 분주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화분증을 일으키는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 보니 뾰족한 수는 없나 보다. 그래도 그들
살아야 한다면 조선민중과 함께 살리라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의 삶-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新人의 朝鮮印象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布施辰治;1890-1953)는 그렇게 조선의 인상을 쓰고 있다. 그 무렵 한다하는 일본인들의 조선방문기에는 경치가 좋으니 평양기생이 예쁘다느니 하고 변죽을 울리는데 반해 후세 변호사의 조선 첫인상은 다르다. 경성행 열차 안에서 까닭 없이 조선인을 얕잡아 보던 일본인을 목격하면서 그는 식민지 지배국 사람들의 거친 횡포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내가 후세다츠지를 만난 것은 이십 여 년 전 도쿄 진보쵸의 헌 책방에서였다. 어느 변호사의 생애, 후세다츠지, 이와나미출판, 1963라는 한 권의 일본어판 책을 읽은 이후 나는
이윤옥 한점 불빛도 없이 개는 소리만 요란한 좁고 더러운 조선인 구역 지나 어두운 밤길을 인력거가 여관방을 향해 달린다 나는 무엇이 좋아 동경의 화려한 네온을 뒤로 하고 조선 땅에 와 있는가 도서관도 없고 강연회도 변변한 음악회도 없는 땅 메이지 40년(1907) 봄 3월 더럽고 누추한 경성에 온 것을 후회하는 총독부어용신문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 동양척식회사 땅 3정보 공짜로 빌려 8년간 사과 농사지을 땐 한몫 잡자는 뜻이었겠지 조선인이여! 조선과수사업을 번창케한 구즈미의 공적을 잊지마라 이 달콤한 사과 향기 조선은 깊이 그리고 길이길이 기억하라 외치지만 그 과수 주렁주렁 열리면 조선인 주려했나? 조선의 과수사업을 번창케 한 구즈미를 조선인은 꼭 기억해야 한다고 글을 쓴 야마가타 이소오(山懸五十雄)(1869~1959)는 시가현(滋賀縣)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영문과를 중퇴한 엘리트. 형 (山縣悌三郞)이 만들던 소년원(少年園) 잡지 편집에 관여하다가 나중에는 소년문고(少年文庫), 만조보(万朝報)등의 영문담당 기자를 거쳐 경성의 총독부 어용신문인 서울프레스(ソウルプレス) 사장에 취임한다. 이 시절 '경성에는 기생과 끼고 노는 요릿집 외엔 갈 곳이 없다.'고 투
요즘 길거리나 상가에 가보면 어느 나라에 와 있는지 모를 만큼 온통 영어와 한자를 섞어 엉터리 조어법으로 만든 광 고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예전 서울시가 “일어서自”라는 광 고를 내더니 이제 그 못된 짓을 산하기관인 지하철이나 심지어 작은 음식점까지도 이에 편승하는 데 열심입니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 역에는 수필 곧 “에세이”를 한자와 영어의 엉터리 조합인 “愛say”라고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 글은 5678 도시철도공사의 좋은 글 공모전 광 고입니다. 좋은 글과 사랑 ‘애(愛)’ 그리고 영어 ‘say’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그냥 수필이라고 쓰면 촌스러운가요? 그런가 하면 음식점에서 주는 젓가락 봉투에 “24時 포장 ok”라는 문구도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우리 얼레빗은 얼마 전 “살가운 역 이름 알리기, 애오개·굽은다리·장승배기”라는 글을 써서 5678 도시철도공사의 한글사랑을 칭찬해줬는데 사실은 한글사랑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중국 연변자치주의 연변대학교 총장은 몇 년 전 한국에 와서 “만주족은 말에서 내린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은 타는 말보다는 입으로 하는 말을 이릅니다. 우리도 이러다가 흔적도 없이
79. 옥스퍼드 사전과 ‘쓰나미’ 사상 유례 없는 대지진의 재앙이 일본 열도를 휩쓸고 지나간 지 열흘째를 맞는다. 신문방송에서는 “엄청난 물기둥을 몰고 온 쓰나미가 일본 동북지방을 싹 쓸어 갔다”고 대서특필했다. 이웃나라 일이지만 우리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며칠 전부터는 일본을 돕자는 “성금 물결이 쓰나미처럼 한반도를 달구고 있다”라는 기사도 보인다. 3월에 때 아닌 구세군 자선냄비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지난 열흘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다. 일본인보다도 한국인들이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고 보기에 따라서는 우왕좌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 며칠 새 티브이와 신문에서 맞닥트리던 ‘쓰나미’란 말은 이제 너무도 귀에 익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말처럼 익숙해져 버린 느낌이다. 피해도 크고 분위기도 뒤숭숭한 판국에 누가 ‘쓰나미’란 말을 쓰지 말고 ‘지진해일’이란 말을 쓰자하면 몰매 맞을 분위기다. 일부 신문이나 방송국 기자들은 애써 '쓰나미‘란 말을 피하고 ‘지진해일’이라고 쓰고 있지만 대세가 ‘쓰나미’인 분위기다. 이번 일본 동북지방의 대지진으로 인해 한국 어린이들까지 확실히 ‘쓰나미’란 말을 익혔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최고의 한글학자이셨던 외솔 최현배 선생은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여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나친 국수주의라는 것이었죠.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조선시대 이미 ”날틀“이란 말이 쓰였음을 아는 이는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솜틀, 재봉틀처럼 기계를 ”틀“이라 불러왔지요.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에는 “날틀” 곧 “비거(飛車)”가 활약했었다고 하지요. 일본 쪽 역사서인 ‘왜사기’에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날틀은 하늘을 나는 차를 말하며, 곧 비행기의 다른 말이라 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쓴 신경준 문집 ≪여암전서≫와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이 '비거' 곧 날틀이 등장하지만 정확한 모양이나 어떤 쓰임새였는지는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지요.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말도 많이 수입되었습니다. 이때 대부분 말들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고, 지식인들은 이를 우리 토박이말로 바꿔보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대로 써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지식인들 대부분이 일본에 빌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