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바램 흔히, 어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뜻으로 쓰는 ‘바래다’는 ‘바라다’의 잘못이다. 명사형도 ‘바람’이 옳고, ‘바램’은 잘못이다. 그런데도 “하루바삐 다시 만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처럼 일상생활에서 ‘바램’이라는 말을 무척 자주 듣는다. 그리고 학교나 방송에서 바르게 고쳐 주어도 웬만해서는 ‘바람’으로 바로잡아 쓰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선 몰라서도 그러려니와, 달리는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네”의 ‘바람’과 소리가 같아서 심리적으로 피하고 싶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두 말이 문맥상 뜻이 혼동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소리가 같다아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라”에서 ‘나는’은 ‘날다’의 관형사형이다. 그런데 흔히 ‘날으는 새, 날으는 원더우먼’처럼 ‘날으는’으로 쓰고 있다. 이것도 아마 ‘나는 원더우먼’이라 하면 ‘내가’ 원더우먼이라는 뜻과 혼동될까봐 심리적으로 피해 ‘날으는’을 쓸 수도 있을 터이다. 이런 심리작용으로 말이 바뀌기도 한다. 옛말 ‘ㄴㆎ’는 연기를 뜻했는데, ‘ㅇㆍ’가 소멸되어 ‘아’로 바뀌게 되니 ‘내’가 되었다. 그렇게 되니, 냄새를 뜻하는 ‘내’와 소리가 같
노릇·구실론 / 최인호 사람·직업·직책들과 어울려 그 ‘본디 구실’을 일컫는 말로 ‘노릇’이 있다. 아비노릇·자식노릇·사람노릇에 교사-·농사꾼-·외교관-·경영자-·기술자-·기자-·광대-·작가-·학자-·변호사-· …처럼 ‘노릇’을 붙여 못 만들 말이 없는데, 언뜻 속되게 들릴 때도 있으나, 본디 낮잡거나 높잡는 말이 아니다. 제대로 그 ‘노릇’을 하자면 공부가 깊어야 한다. 그 공부를 뭉뚱그린다면 ‘노릇론’이나 ‘구실론’이 될 터이다. 학자가 학자노릇을, 광대가 광대노릇을 못한다면 정말 ‘못할 노릇’ 아니겠는가. 분수·인성론, 윤리학을 넘어서는 공붓거리가 될 법하다. 얼마 전 청와대 쪽에서 ‘역할 분담론’이 나왔다. 대통령노릇이 너무 ‘제왕적’이어서 그 권한·노릇을 총리나 장관들에게 좀 나눠 일을 챙기자는 말 같다. 지난해 국어연구원이 교과서·소설·신문에서 자주 쓰는 말을 조사했더니 500번째 안에, 정확히는 443번째로 이 ‘역할’(役割=아쿠와리)이 자주 쓰였고, ‘입장’(立場=다치바)도 450번째였다고 했다. 이땅 사람들이 이 일제 수입말들을 쓰지 않으면 말이 안 될 정도라니! 여기서 새끼친 말이 “역할극·역할놀이·역할모델·교수역할·성역할·부부역할·가교역할
정체성/정통성 일몬 곧 사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가능성, 개성, 개연성, 독창성, 영원성, 우월성, 창의성, 탁월성 들처럼 숱하게 많지만, 요즈음 신문에 자주 보이는, 정치꾼들이 공세 용어로 쓰는 ‘정체성’은 전혀 실체가 없는 헛것이다. 정체(正體)는 글자 그대로 참된 형체, 곧 탈을 쓰거나 위장하지 않은 실체를 뜻하는 말로, “저 괴한의 정체가 궁금하다” “탁월한 학문적 권위와 고매한 인격으로 존경을 받아온 ○○○ 교수의 정체가 ×××의 지령을 받아, 활동해 온 고정간첩으로 밝혀졌다”와 같은 예문을 들 수 있다. 한편, ‘정체성’은 그 소리에 대응하는 실체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말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정통성’은 엄연히 존재하니, 이를테면,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제에 주권을 빼앗겨, 반만년 역사의 명맥이 끊어졌지만, 19년 3·1 독립운동 끝에 세워 역사의 끊어짐을 극복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는 당당한 ‘정통성’을 지닌 것이다. 60년 3·15 부정 선거에 항거한 4·19 혁명 끝에 들어선 제2 공화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박탈한 유신정권은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훼손한 세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픈마인드는 훌륭하고, 열린 마음은 이상한가요?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살려 써야할 때 며칠 전 텔레비전을 보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은 적이 있었다. 대안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에 대안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한 아버지가 한 말은 그야말로 문화사대주의가 아니면 잘난 채에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픈마인드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의 입에서 쉽게 나오는 이 말을 우리는 진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세계화 속에 파묻혀 외래어를 남발하는 것이 진보는 아닐 터이다. 굳이 ‘오픈마인드, 커뮤니케이션’으로 말을 해야 할까? ‘열린 마음’과 ‘이야기’ 혹은 ‘대화’라고 하면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잘못된 버릇일까? 이런 사례는 텔레비전에서도 신문, 잡지, 책에서도 각종 회의나 행사자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회의 자리나 각 홈페이지들, 경제자료들에서 콘퍼런스, 솔루션, 포트폴리오, 이니셔티브, 네가티브, 디폴트는 흔히 듣는 말이고, 텔레비전에서 이슈, 스페셜, 토크쇼, 섹션, 캠프, 선데이, 컬처 클럽, 네트워크, 모닝, 와이드, 투데이, 플러스, 오픈, 휴먼스토리,
"바른 의식" 우리말 낱말을 기원에 따라 나누어 보면 토박이말, 한자말, 서양 외래말이 큰 몫을 이룬다. 이들에 대해 언어 사용자들의 의식을 조사해 보면, 서양 외래말에 가장 높은 가치를 주고, 그 다음 한자말, 토박이말 차례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외래 문물을 떠받드는 풍조에서 나온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한 언어 태도라고 할 수 없겠다. ‘커피숍’에 ‘다방’이 밀려난 지 오래고, 불과 몇 해 만에 ‘웨딩홀’이 ‘예식장’을 몰아냈다. 가게를 ‘개업’하는 이들보다 ‘오픈’하는 이들이 훨씬 많아졌다.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습니다” 하면 고상하게 물건을 사고파는 일처럼 생각이 들지만, “싼값에 팝니다, 헐값에 팝니다” 하면 그냥 길거리에서 물건을 떨이하는 것처럼 속되게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 의식 형편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아울러 요즘 신문·방송의 기사, 생활정보, 광고 따위를 살펴보면 ‘저렴하다’란 말이 ‘싸다’라는 말을 밀어내고 있다. 상인들로서는 무조건 손님들의 환심을 살 만한 낱말을 골라 써야 장사가 되니 어쩔 수 없을 터이나, 언론까지 따라가며 부추기는 태도는 문제다. 물건값을 깎는 데도 그렇다. 값을 깎아 준다고
파이팅/‘아리아리’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끼리 잘 싸우자, 힘내자는 뜻으로, 또는 응원하는 사람이 선수에게 힘내서 잘 싸우라는 뜻으로 ‘파이팅’(fighting)이란 말을 외친다. 본래 이 말은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영어에서 이 말은 호전적인 뜻으로 ‘싸우자’ ‘맞장 뜨자’는 정도의 뜻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위와 같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계속하자’ 뜻으로는 속어로 ‘키프 잇 업’(keep it up)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 ‘파이팅’은 출처가 모호한 가짜 영어인 셈이다. 또 이 말을 ‘화이팅’이라고 소리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외래어 표기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물고기인 ‘대구’(whiting)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더욱 이상하다. 원래 우리 겨레는 그런 식의 상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국어심의회에서 이 말을 ‘힘내라’로 다듬어 쓰자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말 순화 운동가 한 분이 이 말을 ‘아리아리’로 바꿔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제안하였다. 곧, ‘아리랑’의 앞부분인 ‘아리아리’는 ‘여러 사람이 길을 내고 만들어간다’는 뜻으로 위의 뜻을 잘 뭉뚱그린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예술적이고 도덕
이보오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오리 전택부(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 사람이란 한번 태어나면 먹기부터 시작한다. 입질부터 시작한다. 장성해서는 돈벌이를 시작한다. 구멍가게를 차리든지, 논밭을 갈든지, 글을 쓰든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벌이를 해야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운명이다. 돈과 생로병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돈 없이는 살수가 없다. 그렇다면 돈은 어떻게 해야 많이 벌 수 있는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일만 많이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일도 정도 것 해야지, 돈 생긴다고 아무거나 막 하다가는 낭패하기 일쑤다. 옛부터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악한 사람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러나 그 돈은 오래가지 못한다. 선한 사람의 돈이라야 오래간다. 선한 사람의 돈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자고로 유교에서는 적선지가(積善之家)여는 필유경(必有慶)이라 했고 기독교에서는 온유한 사람이라야 땅을 차지한다고 했다. 또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도 했다. 그러나 돈은 인간이 만든 필요악이다. 돈은 있어야 살 수 있다. 반만년 우리 역사 중에 세종대왕만큼 선한 임금은 없
낱말 ‘먹거리’ 시비 김수업 /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 먹거리라는 낱말이 한때 제법 쓰였으나 요즘은 거의 자취를 감춘 듯하다. 한때 제법 쓰인 데에도 어느 한 분의 애태움이 있었고, 자취를 감춘 말미에도 어느 한 분의 걱정이 있었음을 나는 안다. 나처럼 이런 속내를 아는 사람은 말이라는 것이 저절로 생겨났다가 저절로 죽어버린다는 통설을 믿기 어려워진다. 말이라는 것이 더불어 쓰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약속으로 살아나기도 하고 죽어버리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반드시 맨 처음에는 누군가가 씨앗을 뿌려야 하고 마침내 누군가가 싹을 자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먹거리를 살리려 애태우던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이 먹거리라는 낱말을 살리려고 애를 태우던 시절의 한 고비를 잘 알고 있다. 내가 경상대학교에 있던 1970년대 후반에 그분은 우리 대학으로 먹거리라는 낱말을 써도 좋으냐고 글을 보내 물어왔다. 그분이 보낸 글들에는 자신이 세계식량기구에서 일하며 우리말에는 영어 ‘food’처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싸잡는 낱말이 없어 찾아 헤맨 사연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먹거리’라는 낱말을
일상생활에서 낱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의 애환이 깃든’의 ‘애환’은 ‘슬픔과 기쁨’이라는 뜻인데, 슬픔인줄만 알고 쓴다. 그래서 가끔 ‘삶의 애환과 기쁨이 깃든’과 같이 겹친 표현이 나온다. 뜻을 잘못 알고 쓰는 말 가운데 ‘서구’라는 말도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경제의 위기는 세계 경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광복후 서구의 학문, 특히 미국의 학문 방법론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여기서 ‘서구’(西歐)라는 말은 잘못 쓰였다. 이는 서구라파(西歐羅巴)를 줄인 말이다. 구라파는 ‘유럽’을 한자음을 빌려쓴 표기다. 프랑스를 한자음을 따서 ‘불란서’라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렇다면 앞에서 ‘미국을 비롯한, 미국의 학문방법론’과 같이 미국을 포함하는 경우 ‘서부 유럽’을 뜻하는 서구라는 낱말을 쓰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대신 ‘서양’이라는 말을 써야 올바르다. 따라서 서유럽을 가리킬 때는 ‘서구’라는 낱말을, 미국과 유럽을 함께 묶어 표현할 때는 ‘서양’이라는 낱말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한자음을 빌려 적은 지명은 될수록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에 보기를 든 ‘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