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906년 2월 1일 일제는 조선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기구인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통감부는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써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통감부는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지요. 이때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으며, 통감정치의 실시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대한제국 정부를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위장하고 조선 사람들의 반일 기세를 무마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일제는 통감부를 조선의 국가유신 실현을 위한 기관으로 얘기했으나, 물론 이것도 악독한 식민지배를 감추기 위한 속임 술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1907년 5월 이완용(李完用)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체제를 만들었지요. 이처럼 실질적인 식민통치의 성격을 갖는 통감정치의 실시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우리 겨레의 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고종 44년(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문회(文會) 특별회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광문사의 부사장 서상돈은 모든 국민이 금연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했고,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면서 즉석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됐습니다. 이어 2월 21일,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동광문회 주최로 국채보상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려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됐고, 대회에 참석한 군민들부터 성금을 모으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전국 각 지역으로 번져 나갔지요 이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떠안긴 차관 1,300만 원을 온 국민의 힘을 모아 청산함으로써 경제 자립을 실현하고 나아가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1906년을 기준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세입액은 1,318만 9,336원, 세출액은 1,395만 523원으로, 적자 상태였기에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거액의 국채를 대한제국 정부가 도저히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모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매화보다도 더 일찍 눈을 뚫고 꽃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얼음새꽃이 있습니다. 얼음새꽃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며 숲속 습기가 많은 그늘에서도 자라는 꽃으로 키는 보통 10~30cm입니다.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둥그렇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하여 눈색이꽃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생명력이 강하다고 하여 한자말 복수초(福壽草)로 알려졌습니다.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 하여 설련화(雪蓮花), 꽃이 황금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하며 눈송이꽃이라고도 불리는 등 이름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모진 겨울의 껍질을 뚫고 나온 / 핏기 어린 꽃의 날갯짓을 봐 / 햇살 한 모금에 터지는 신(神)의 웃음을 / (중략)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 어둠 속 깨어나지 않는 벽을 넘어 /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고 있구나 / 낙엽더미의 굳은 목청을 풀어 / 마른 뼈들 살아 굼틀하는 소리 / 산을 들어 올리는 저 생기를 봐.” 한현수 시인은 얼음새꽃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며 꽃피는 얼음새꽃에는 산을 들어 올리는 생기가 엿보입니다. 산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 제178호로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 무늬 편병(扁甁)’이 있습니다. ‘편병’이란 몸체의 양쪽 면이 편평하고 납작하며, 위쪽에 주둥이가 달린 휴대용으로도 쓰인 술병을 말합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토기에도 그 예가 있었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널리 쓰였지요. 분청사기에 많이 남아 있지만, 백자나 청화백자(靑華白磁)에도 있어 조선시대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무늬 편병(扁甁)’은 조선시대 전기에(15~16세기 무렵) 제작된 편병으로 크기는 높이 22.6㎝, 입지름 4.5㎝, 밑지름 8.7㎝입니다. 백토을 두껍게 입히고 조화수법으로 무늬를 그린 위에 연한 청색의 투명한 유약을 칠하였습니다. 앞ㆍ뒷면과 옆면에 서로 다른 무늬와 위로 향한 두 마리의 물고기를 생동감이 넘치는 선으로 그려냈지요. 물고기 무늬는 분청사기 조화수법의 특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데 조화수법이란 백토로 바른 그릇에 선으로 오목새김의 무늬를 새겨넣고 백토를 긁어내어 하얀 선으로 된 무늬를 만드는 기법입니다. 양 옆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위와 중간에 4엽 모란무늬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장사지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망곡(望哭)을 하였고, 백관(百官)들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곡하였다.” 이는 《영조실록》 21권, 영조 5년(1729년) 1월 26일 기록입니다. 《영조실록》은 뒤이어 “아! 통탄스럽다. 무신년(1728년)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곧 사기일(私忌日)이며, 나이 겨우 10살로써 왕세자에 있는지 겨우 4년이었다. (가운데 줄임) 아! 나의 비덕으로 믿는 바는 오로지 왕세자였고,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았기에 동방(東方)의 만년의 복이 될 것을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10살 만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는가?”라고 영조는 통탄해했습니다. 사실 효장세자는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했다.’라고 합니다. “어느 날 서운관에서 탁상시계인 문신종(問辰鐘)을 바치자 그냥 서당에 놓아두었다. 한데 젊은 내관이 그것을 구경하다 잘못 건드려 고장이 나버렸다. 영조가 서당에 찾아왔을 때 중관이 그 일을 고하면서 내관을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우연히 일어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35년 전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漢城旬)報>의 복간형식으로 박문국(博文局)에서 우리나라 첫 주간신문인 <한성주보(漢城周報)>가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깨닫게 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삼았는데 1884년 4월 19일 김윤식(金允植)이 통리아문독판(統理衙門督辦, 조선 말기 외교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 벼슬)에 임명되면서 발간작업이 추진되었지요. 편집체재는 1단제로서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는데 규격은 세로 22.5㎝, 가로 16.5㎝였습니다. 특히 <한성순보>가 한자만을 쓴 데 반하여 이 신문은 최초로 국한문을 섞어 썼고, 내용에 따라 순한글 또는 순한문만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부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국민계몽에 한 발짝 내디뎠다는 것으로 평가를 받지요. 주보는 제4호인 1886년 2월 22일 자부터는 상업광고를 실었는데 독일인 상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50년 전인 1971년 1월 22일 집권 8년 차에 접어들었던 박정희 정권은 부처별 지시사항을 발표했습니다. 50여 개에 달하는 이 지시사항은 경제성장과 국민생활 개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속에는 장기집권에 필요한 국민 감시 규제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지요. 특히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문화 전반에 걸쳐 검열을 주도했는데 박정희는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히피 머리형의 장발족은 국영뿐 아니라 민간 텔레비전 방송에도 절대 출연하지 못하게 하라”고 직접 지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은 길거리에서 히피 머리형의 장발족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였고, 시민을 마구잡이로 연행해 머리를 깎은 뒤 집으로 돌려보기까지 했지요. 이에 대해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장발 추악한 작폐 등은 사회윤리와 법질서를 문란 시키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 건전한 국민정신을 해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아울러 신문ㆍ방송ㆍ영화ㆍ음악ㆍ도서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검열을 강화하도록 하는 ‘자율 규제 강화 방안’을 지시하기까지 합니다. 이후 예술과 국민의 의사 표현에 대한 자유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화군 교동도 읍내리에 가면 교동향교 옆에 비석(碑石) 40개가 모여 있는 <읍내리 비석군>이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ㆍ도호부사(都護府使)ㆍ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ㆍ부사 등을 지낸 사람들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를 한곳에 모아놓은 것입니다. 원래는 읍내리 교동양조장 부근 비석거리에 있던 것들인데 1991년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암행어사,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공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박영보(朴永輔)의 ‘휼민선정비’도 있습니다. 실제 어떤 선정비는 벼슬아치들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세워진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만 이 박영보는 조선왕조실록에 54번이나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는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 많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는 경기감사로 있을 때 부하 벼슬아치가 잘못하자 이에 상관으로서 책임이 있다며, 자신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 것은 물론 대사헌일 때 임금에게 언로(言路)를 열어 충언을 듣고 검소한 삶을 살아 백성을 사랑할 것을 간언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인 대한(大寒)입니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가장 추운 날이지만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한 무렵이 대한 때보다 훨씬 추울 때가 많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따위의 집안 손질은 언제나 “신구간(新舊間)”에 하지요. 신구간은 대한 뒤 5일에서 입춘 전 3일 동안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모든 신이 염라대왕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여도 탈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에는 이사하는 것은 물론 부엌, 문, 변소, 외양간 고치기, 울타리 돌담고치기, 묘소 고쳐 쌓기 등 다양하지요. 소한부터 대한까지는 한해에 가장 추울 때인데 예전엔 세수하고 잡은 방문 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었습니다. 또 눈 덮여 황량한 겨울 들판엔 칼바람 추위 속에 먹거리도 부족하니 사람도 뭇 짐승도 배곯고 움츠리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이 만물이 얼어붙어 죽은 듯한 땅에도 저 멀리 봄소식은 오고야 맙니다. 소설가 김영현은 그의 작품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에서 "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명승이 널려 있는 제주도 한라산의 남서쪽 표고 1,500∼1,700m에 펼쳐진 완만한 초원지대인 선작지왓도 명승 제9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털진달래, 산철쭉을 비롯한 키가 작은 떨기나무(관목)류가 널리 분포하며, 4월부터 6월까지 털진달래의 연분홍색과 산철쭉의 진분홍색으로 온 지역을 뒤덮어 산상 화원의 경이로운 장관을 연출합니다. 또 겨울엔 눈 덮인 설원의 한라산 정상과 어우러진 경관은 선경(仙景)을 만들어 자연경관 값어치가 뛰어나지요. 선작지왓은 한라산 고원의 초원지대 가운데 영실기암 윗부분에서 윗세오름과 방애오름에 이르는 곳에 있는 평원지대입니다. 선작지왓에서 ‘작지’는 조금 작은 바위나 돌을, ‘왓’은 벌판을 가리키는 제주말이어서 돌들이 널려 있는 벌판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또는 ‘선’에 ‘서 있다’라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선작지왓은 바위들이 서 있는 넓은 벌판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탑궤를 비롯하여 높이가 7∼10m에 달하는 큰 바윗돌 무리가 10여 곳에 분포하고 있지요. 이곳에는 산철쭉, 털진달래, 눈향나무, 시로미의 군락이 넓게 발달해 있고 누운오름 아래는 연중 물이 흐르는 노루샘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