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살아계셔서 편히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이 편지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는 말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백범일지(白凡逸志)》 원문을 보니 한자를 읽을 수 있는데도 도무지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100년도 안 된 시간에 우리말 법이 이렇게 달라져 있는 것은 그만큼 소용돌이치는 역사 시기를 지나왔다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을 부르는 자체도 송구스럽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대한민국의 최고의 어르신이요 제일의 독립지사를 소시민에 불과한 제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이 무례한 짓 같아서요. 지금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가장 존경하는 애국지사로 선생님을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먼저 가슴이 아려오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에는 ‘만일’을 대입해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도 아쉬움이 크고 한탄스러워서요. 만일 선생님의 주장대로 당시 해방 공간에서 남북 지도자들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한 발씩 양보하고 조금만 더 깊이 숙고하고 의견을 모아 남북으로 하나의 정부를 만들어 내었더라면, 그 후 오늘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시냇물이 모여 큰 강물을 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恨)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조선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 이는 1919년 4월 5일 해주 만세 운동 때 쓰기위해 옥운경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이 직접 한글로 쓴 독립선언서 내용이다. "오늘 해주 기생(海州 妓生) 일동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해중월, 벽도, 월희, 향희, 월선, 화용, 금희, 채주 등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다." 이는 매일신보,每日申報 1919년 4월 5일치 기록이다. 이에 앞서 1919년 2월 말, 문응순(예명 月仙), 김성일(예명 月姬)은 고종의 인산(因山,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 들의 장례)을 보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종의 인산을 보고 해주로 돌아왔다. 해주의 만세운동은 3월 1일과 3월 9일에 이어 4월 5일에 크게 일어났는데 이날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들은 옥운경, 김해중월, 이벽
[우리문화신문=전수희기자] 노란봉 정기 받고 자란 몸/경성에 올라와 /푸른 꿈 펴렸더니 가지에 푸른 순 돋기도 전 /밑동 잘렸네 방직공장 다니면서/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뜨거운 독립의 노래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당하지 않았다면 /스물 둘 꽃다운 나이 접고 눈 감지 않았을 것을... 이는 이윤옥 시인의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독립의 노래 ‘고수복’ 시 가운데 일부이다. 그렇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선조들의 삶은 비린내 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신념하나로 청춘을 불사른 이들이 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그런 분들이다. 유달산 묏마루에 태극기 높이 꽂은 “김귀남”, 훈춘에 곱게 핀 무궁화꽃 ‘김숙경’, 혁명의 강물에 뛰어든 조선인 “김알렉산드라” 등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그대는 들어나 보았는가! 곧 다가올 광복 71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일호에서는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한 여성독립운동가 30인 시화전을 8월 10일부터 16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쫓아 시를 쓰고 있는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4, 5권에 나오는 30분의 시에 이무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홍주성 전투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전사한 채광묵 채규대 부자(父子) 의병을 2016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채광묵은 충남 홍주 매평리(현 충남 청양)에서 당시 문장가로 활약하던 채동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일제 하 홍주지역은 항일 민족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896년 홍주의병은 김복한을 총수로 반개화, 반침략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홍주지역 유생들이 일으킨 반일투쟁이었다. 그러나 관찰사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채광묵은 상경하여 송수만 등과 도약소를 차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외부대신 이완용 등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1901년 8월에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며 강하게 거절하였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하고 일본 공사를 만나 이를 질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대를 물리쳤다. 참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일제 침략 없었다면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갓 태어난 핏덩이 남겨두고 뛰어든 항일의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유치장 밖서 숨져간 어린 딸 눈에 밟혀 어찌 항일독립의 깃발 들었을까? - 핏덩이 남겨두고 독립의 깃발 높이든'박치은'- , 이윤옥 시 “네년의 남편이 곽치문이지? “그렇다.” “네 남편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왜경을 마구 쏘아 죽이는 악질분자다. 고얀 것들 !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강도들, 너희가 그런다고 독립이 될 줄 아냐? 이년은 악질이니까 옷을 벗기고 쳐야해.” 박치은 애국지사를 취조하던 왜경은 옷을 모두 벗기면서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며 실신하도록 팼다.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박치은 애국지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갓 태어나 이제 한 달 밖에 안 된 어린 생명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기에게 젖을 주어야하니 아기를 이리로 들여보내주시오.” 박치은 애국지사는 유치장 밖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기를 떠 올리며 그렇게 애원했다. 왜경은 이내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년이 새끼 귀한 줄은 아느냐?”며 아기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유치장 창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고양시 신원도서관에서는 22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2시간 동안 2층 교양교실에서 “아주 특별한 겨레 얼 살리기 청소년 강좌”를 열었다. 이번 강좌는 신원도서관 시민참여단 새원누리와 신원도서관(관장 장은옥) 주관, 서울시비영리단체(제1259호)인 한국문화사랑협회(회장 김영조) 주최로 진행된 것으로 모두 4회에 걸쳐 강좌가 열린다. 첫 회 강좌가 열린 22일은 관내 신원중학교를 비롯한 중고등학교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임에도 청소년들은 “겨레 얼 살리기 청소년 강좌”를 듣기 위해 교양교실 자리를 가득 메웠다. 신원도서관에서는 일제침략시기 국난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문화행사의 한 고리로 청소년 대상의 이번 강좌를 마련했는데 40명의 학생들이 신청을 해 이날 첫 강좌가 열린 것이다. 이번 신원도서관의 “아주 특별한 겨레얼 살리기 청소년 강좌”는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맡아서 진행하며 7월 22일의 중국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시작으로 2회차는 일본과 국내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이어 3회차는 겨레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본말, 4회차는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본말 찌꺼기로 진행된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기미년 마산 장터 삼천 명 선두에 선 의신학교 열다섯 소녀 태극기 물결 속 격문 뿌리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다 잡혔어도 모진 고문 이겨내고 조선인 투지를 빛낸 당찬 모습 광복의 밑거름 되었어라. -마산의 결사단을 이끈 “최봉선”, 이윤옥 시- 어제(21일) 최봉선(崔鳳善, 1904. 8.10~1996.3.8) 애국지사를 뵈러 대전국립현충원엘 찾았다. 칠월의 짙푸른 신록 속에 수많은 영령들이 잠든 무덤가에는 따가운 햇볕만 내리쬘 뿐 무덤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애국지사 제2묘역 564. 무덤에도 번지수가 있다. 애국지사 묘역은 정문에서 걷기에는 다소 먼 느낌으로 현충원 위쪽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봉선 애국지사 무덤으로 가는 길에 만난 숱한 분들의 묘비 시구(詩句)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람타는 섬 제주의 아들 / 제 살 썩혀 진주되는 법 알았으니 /조국의 외외한 혼으로 남으리 - 애국지사 부두전의 묘 - 찬이슬 눈보라에 님 한 몸 가눔 없이/ 빼앗긴 나라 찾기 오직 한마음/ 수만리 만주벌판 말달리며 지새운 나날/ 풍진 스무해 / 못 다한 큰뜻 가슴에 묻고/ 오호라 님은 가시니../ 그 한 사무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상해의 7월은 서울 보다 무덥다. 지난 16일 상해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에 들른 날도 찜통 같은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90여 년 전 이곳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여념이 없던 선열들을 떠올리다 보니 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해 관광을 오던 항주나 인근 지역에 볼일을 보러 오던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는 이제 한국인들의 필수 코스처럼 되어버렸다. 임시정부청사 유적지야말로 고난에 찬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온 몸으로 말해주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다. 임시정부청사 건물은 낡고 비좁았는데 삐거덕 거리는 청사 계단을 오르며 많은 상념에 젖어본다. 밀랍인형으로 만든 백범 김구 선생이 청사 2층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모습이 마치 그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다보았다. 어디 백범 김구 선생뿐이겠는가. 이곳을 드나들던 숱한 독립지사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간다. 사실 이번에 상해를 찾은 것은 여성독립운동가 가운데 한분인 김윤경(金允經, 1911. 6.23~1945.10.10)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였다. 김윤경 애국지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고향인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으로 일찍이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스물일곱 청년 목숨 걸어 폭탄 든 사연 아는 자 몇이런가 일제에 강탈당한 조국의 신음소리 외면했다면 그 혈기 다 바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으리 고향땅 밀양서 뜻 세운 청년 남만주 봉천 땅서 의기 충전 다시 고향땅 거사라 1921년 7월 8일 대구 감옥 교수대서 몸은 갔지만 그의 넋 그의 혼 영원히 우리 가슴에 살아남으리. ' 스물일곱에 순국의 길 걸은 최수봉 의사 - 이윤옥 시-' 성균관유도회 밀양지부 상남면지회(회장 김병기)는 밀양의 대표 독립운동가인 최수봉 의사의 순국일인 지난 8일, 상남면 마산리 최수봉 의사 기적비 앞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최수봉 의사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허홍, 정윤호 시의원을 비롯한 유도회 회원, 지역주민, 상남초 학생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독립운동가 최수봉 의사는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체포되어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해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행사를 주관한 김병기 지회장은 "이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이신애 [1891~1982] 선생은 평북 구성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한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사하였으며, 이후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낮에는 편물로 학자금을 벌고 밤에는 학업에 전념하던 중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학교를 중퇴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이신애는 1914년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부흥회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5월부터 혈성부인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19년 9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온 강우규를 은닉해 주고 군자금을 모집해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9년 9월 초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부인단 총대에 선출되었다. 당시 대동단은 1919년 10월 초 조직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 위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 등과 연계해 제2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