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일제 침략 없었다면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갓 태어난 핏덩이 남겨두고 뛰어든 항일의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유치장 밖서 숨져간 어린 딸 눈에 밟혀 어찌 항일독립의 깃발 들었을까? - 핏덩이 남겨두고 독립의 깃발 높이든'박치은'- , 이윤옥 시 “네년의 남편이 곽치문이지? “그렇다.” “네 남편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왜경을 마구 쏘아 죽이는 악질분자다. 고얀 것들 !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강도들, 너희가 그런다고 독립이 될 줄 아냐? 이년은 악질이니까 옷을 벗기고 쳐야해.” 박치은 애국지사를 취조하던 왜경은 옷을 모두 벗기면서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며 실신하도록 팼다.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박치은 애국지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갓 태어나 이제 한 달 밖에 안 된 어린 생명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기에게 젖을 주어야하니 아기를 이리로 들여보내주시오.” 박치은 애국지사는 유치장 밖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기를 떠 올리며 그렇게 애원했다. 왜경은 이내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년이 새끼 귀한 줄은 아느냐?”며 아기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유치장 창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고양시 신원도서관에서는 22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2시간 동안 2층 교양교실에서 “아주 특별한 겨레 얼 살리기 청소년 강좌”를 열었다. 이번 강좌는 신원도서관 시민참여단 새원누리와 신원도서관(관장 장은옥) 주관, 서울시비영리단체(제1259호)인 한국문화사랑협회(회장 김영조) 주최로 진행된 것으로 모두 4회에 걸쳐 강좌가 열린다. 첫 회 강좌가 열린 22일은 관내 신원중학교를 비롯한 중고등학교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임에도 청소년들은 “겨레 얼 살리기 청소년 강좌”를 듣기 위해 교양교실 자리를 가득 메웠다. 신원도서관에서는 일제침략시기 국난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문화행사의 한 고리로 청소년 대상의 이번 강좌를 마련했는데 40명의 학생들이 신청을 해 이날 첫 강좌가 열린 것이다. 이번 신원도서관의 “아주 특별한 겨레얼 살리기 청소년 강좌”는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맡아서 진행하며 7월 22일의 중국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시작으로 2회차는 일본과 국내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이어 3회차는 겨레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본말, 4회차는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본말 찌꺼기로 진행된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기미년 마산 장터 삼천 명 선두에 선 의신학교 열다섯 소녀 태극기 물결 속 격문 뿌리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다 잡혔어도 모진 고문 이겨내고 조선인 투지를 빛낸 당찬 모습 광복의 밑거름 되었어라. -마산의 결사단을 이끈 “최봉선”, 이윤옥 시- 어제(21일) 최봉선(崔鳳善, 1904. 8.10~1996.3.8) 애국지사를 뵈러 대전국립현충원엘 찾았다. 칠월의 짙푸른 신록 속에 수많은 영령들이 잠든 무덤가에는 따가운 햇볕만 내리쬘 뿐 무덤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애국지사 제2묘역 564. 무덤에도 번지수가 있다. 애국지사 묘역은 정문에서 걷기에는 다소 먼 느낌으로 현충원 위쪽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봉선 애국지사 무덤으로 가는 길에 만난 숱한 분들의 묘비 시구(詩句)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람타는 섬 제주의 아들 / 제 살 썩혀 진주되는 법 알았으니 /조국의 외외한 혼으로 남으리 - 애국지사 부두전의 묘 - 찬이슬 눈보라에 님 한 몸 가눔 없이/ 빼앗긴 나라 찾기 오직 한마음/ 수만리 만주벌판 말달리며 지새운 나날/ 풍진 스무해 / 못 다한 큰뜻 가슴에 묻고/ 오호라 님은 가시니../ 그 한 사무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상해의 7월은 서울 보다 무덥다. 지난 16일 상해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에 들른 날도 찜통 같은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90여 년 전 이곳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여념이 없던 선열들을 떠올리다 보니 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해 관광을 오던 항주나 인근 지역에 볼일을 보러 오던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는 이제 한국인들의 필수 코스처럼 되어버렸다. 임시정부청사 유적지야말로 고난에 찬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온 몸으로 말해주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다. 임시정부청사 건물은 낡고 비좁았는데 삐거덕 거리는 청사 계단을 오르며 많은 상념에 젖어본다. 밀랍인형으로 만든 백범 김구 선생이 청사 2층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모습이 마치 그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다보았다. 어디 백범 김구 선생뿐이겠는가. 이곳을 드나들던 숱한 독립지사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간다. 사실 이번에 상해를 찾은 것은 여성독립운동가 가운데 한분인 김윤경(金允經, 1911. 6.23~1945.10.10)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였다. 김윤경 애국지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고향인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으로 일찍이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스물일곱 청년 목숨 걸어 폭탄 든 사연 아는 자 몇이런가 일제에 강탈당한 조국의 신음소리 외면했다면 그 혈기 다 바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으리 고향땅 밀양서 뜻 세운 청년 남만주 봉천 땅서 의기 충전 다시 고향땅 거사라 1921년 7월 8일 대구 감옥 교수대서 몸은 갔지만 그의 넋 그의 혼 영원히 우리 가슴에 살아남으리. ' 스물일곱에 순국의 길 걸은 최수봉 의사 - 이윤옥 시-' 성균관유도회 밀양지부 상남면지회(회장 김병기)는 밀양의 대표 독립운동가인 최수봉 의사의 순국일인 지난 8일, 상남면 마산리 최수봉 의사 기적비 앞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최수봉 의사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허홍, 정윤호 시의원을 비롯한 유도회 회원, 지역주민, 상남초 학생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독립운동가 최수봉 의사는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체포되어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해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행사를 주관한 김병기 지회장은 "이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이신애 [1891~1982] 선생은 평북 구성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한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사하였으며, 이후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낮에는 편물로 학자금을 벌고 밤에는 학업에 전념하던 중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학교를 중퇴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이신애는 1914년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부흥회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5월부터 혈성부인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19년 9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온 강우규를 은닉해 주고 군자금을 모집해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9년 9월 초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부인단 총대에 선출되었다. 당시 대동단은 1919년 10월 초 조직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 위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 등과 연계해 제2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11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명하(趙明河,1905. 4. 8(음력)~1928. 10. 10)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松禾)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용우(趙鏞禹), 모친 배장연(裵長年) 사이의 차남. 본관은 함안(咸安). 조의사는 일찍이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에 탄압 받는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 조의사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듣고 애국남아(愛國男兒)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그 무렵 아들 혁래(赫來)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던 부인 오금전(吳金全)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조의사는 갑자기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처자식을 만나 마음이 흔들릴 지도 모르는 자기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중구(呂仲九)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의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에 상륙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던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소재 '화과원'을 국가사적지로 지정하기 위해 함양군이 본격적인 행보에 돌입했다. 함양군은 경남도의 지원을 받아 사업비 6천만 원을 들여 6∼12월 6개월 동안 함양 백용성선사 화과원 유허지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기본 연구용역과 도자기를 굽던 도요지터 발굴조사 용역을 실시한다고 24일 밝혔다. 군은 오는 12월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재청을 방문, 국가사적 지정을 협의할 계획이다.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50번지 백운산 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화과원은 3・1운동당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이신 백용성 선사가 선수행과 생산적 근로활동을 병행하여 나간다는 선농불교사상을 실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7년 창건한 농장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용성 선사는 참선하며 농사를 짓는 선농불교를 주창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임야와 황무지 70만 정보(30여haㆍ90여만 평)를 사서 농장을 일궜다. 백 선사는 배나무, 감나무, 밤나무, 감자 등을 재배해 판매한 수익금과 도자기를 구워 판매한 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동풍신 열사님! 열사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아무래도 ‘열사’라는 호칭은 조금 거리를 두고 부르는 것 같아, 처음에는 ‘동풍신 할머니’로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7세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신 열사님을 할머니라고 하려니까 아무래도 제게 떠오르는 동풍신 열사의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동풍신 누나’라고 하려니 조금은 불경스러운 것 같네요. 그런데 열사님과 비슷한 나이에 순국하신 유관순 할머니에 대해 유관순 열사라고 많이 부르고, 또 유관순 열사 기념관도 있어, 저도 ‘동풍신 열사’라고 부르렵니다. 동풍신 열사님! 제가 처음 열사님을 만난 것은 이윤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입니다.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관통하던 날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불이 붙었다 이윤옥 시인이 열사님에 대한 뜨거운 가슴을 토해낸 시입니다. 이시인은 동풍신 열사와 유관순 열사가 3.1 만세운동으로 순국하였고, 또 순국할 때 나이가 비슷했던 점 등으로 두 분을 같이 놓고 시를 썼더군요. 저는 이시인의
[우리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저는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집안의 어른들께서 할아버지의 성함을 언급할 때면 늘 크나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말하곤 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지. 중국 대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분이시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다 그 어른 덕분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할아버지는 직계 후손은 물론이고 저같은 방손(傍孫)을 포함해 우리 친척 모두의 영웅이었습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가족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부분 입에 풀칠하고 사는 정도에 그쳤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종종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어쩌면 친척들 사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생전에는 나라를 되찾는 일에, 납북돼 돌아가신 뒤에는 친척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각각 큰 역할을 하신 셈입니다. 김붕준 선생 이제는 할아버지를 직접 뵌 어른들이 친척들 중에도 많지 않습니다. 삼일운동 직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셔서 해방된 뒤에야 귀국하셨다가 그나마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납북되시고 말았으니 직접 뵌 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