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아! 이 몸이 한번 죽으면 오히려 외로운 귀신이 될 것이나 이 머리는 한번 깎이면 영원토록 오랑캐가 되는 것이니 각자 마음에 맹세하여 대의를 붙잡기 바랍니다 -삼계통문 김흥락, 김도화 외 3인 가운데서- *김흥락(1827-1899) 선생은 누구인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 안동 출신. 김성일(金誠一)의 주손(胄孫). 아버지는 능주목사(綾州牧使) 진화(鎭華)이며, 어머니는 이원상(李元祥)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가려뽑아 ≪제훈집설요람 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1845년 4월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이황(李滉)이상정(李象靖)유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 해 겨울 가정과 사우로부터 보고 들은 바를 모아 ≪곤학록 困學錄≫을 편성하고, <초학잠 初學箴><외천설 畏天說>을 지었다.1850년(철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제에 가열차게 싸웠다. 하지만 1932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애국지사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일제를 상대하기에 벅찼기에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던 때였다. ▲ 중국 장개석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계기를 만든 윤봉길 의사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했다. 윤봉길 의거로 일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 이후 중국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높이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우리나라는 독자적인 힘으로 일제를 상대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소련‧미국이 일본과 싸울 때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이상룡(1858-1932) 선생은누구인가?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승목(承穆)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
[그린경제=윤지영 기자]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임진왜란 시 순국한 칠백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칠백의사 순의제향(七百義士 殉義祭享) 행사를 오는 23일 오후 3시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는 칠백의총에서 거행한다. 올해로 421주기를 맞는 이번 행사는 초헌관(칠백의총관리소장)의 분향과 초헌례(初獻禮), 축관(祝官)의 축문 낭독, 아헌관 헌작의 아헌례(亞獻禮), 종헌관 헌작의 종헌례(終獻禮)와 헌관 재배, 문화재청장의 헌화(獻花, 대통령 명의)와 분향(焚香) 순으로 진행된다. 제향행제(祭享行祭) 후 의총참배, 음복다과회가 이어지며, 행사를 통해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게 된다. ▲ 지난해 칠백의총 제향행사 모습 1 이번 행사에는 문화재청장을 비롯하여 지역 국회의원, 충남도지사, 금산군수와 칠백의사 후손 등 1,000여 명이 참석한다. 딸림행사로 화랑도 무도시범단(중부대학교)의 무도시범과 경내 활터에서 활쏘기 체험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또 지난 6월 금산지역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제14회 칠백의사 추모 예능대회 입상작품도 전시한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중봉 조헌(重峯 趙憲) 선생과 승장 영규(靈圭) 대사가 이끄는
▲ 대한제국시절 궁궐로 활용한 덕수궁 중화전 ▲ 황제가 타고 가는 가마 ▲황제가 탄 어가 ▲ 사직단으로 행하는 어가행렬 ▲ 경호부대의 행렬 ▲ 대취타대의 행렬 ▲ 북을 울리면서 ▲ 광화문을 돌아서 ▲ 황태자의 가마 ▲ 사직단에 도착한 황제 ▲ 신위를 모시고 사직단으로 ▲ 신위를 뒤따르는 제관행렬 ▲ 사직단 위로 오르는 모습 ▲ 제단 위로 ▲ 신위를 제단에 안치 ▲ 헌관들의 도열 ▲ 헌관들의 인사 ▲ 제례에 참여한 무용수들 ▲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 제례의식 거행 ▲황제의 입장 ▲ 황제의 제례의식 ▲ 황제의 깃발 [그린경제=최우성 기자]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황제라 부르지만 아무리 황제라할지라도 그가 인간인 이상 황제도하늘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 또한 땅의 자손일 수밖에 없다는 철학이우리에게는고래로부터 있어왔다. 그리하여 하늘에도 제사를 지내고 땅에도 제사를 지냈다. 그런 의미에서 무형의 존재인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별도로 하고 사직대제는 유형의 존재인 땅과 그 땅에서 거두어 인간을 살수 있게 하는 곡식을 주관하는 신을
[그린경제 = 정석현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오늘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 지난 몇 해를 와신상담한 사람인가 이미 정한 이 걸음 평생의 뜻이기에 다시 고향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상해에서 동경으로 가는 배안에서 읊은 시 가운데서- **김지섭(1885-1928) 독립투사는 누구인가? 본관은풍산(豊山). 호는 추강(秋岡).경상북도 안동 출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일어를 자습해 21세 때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였다.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상해시베리아 등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고자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국내에서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신사숭경(神社崇敬)은 실로 일본의 국체관념(國體觀念)의 반영이다. 신사에서 봉납되는 제사는 황국국체(皇國國體)로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이한 일이다. 일본민족은 개국 이래 신사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왔다. 신사는 일본민족의 향토생활의 중심인 것이다. 이러한 신사는 본토를 떠나 멀리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정신생활의 중심이다. (중략) 올해로 성전(聖戰) 5년에 접어들어 지금 일본민족이 전면적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목표 아래 흥아(興亞)의 대업완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며 신사는 일본의 대륙진출의 중심지이다. 위는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만든《대륙신사대관, 1941》머리말에 나오는 말로 조선 내에 신사를 만든 이유를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슨 까닭인지 1940년(소화 15) 11월 현재 전국 13도 가운데 유독 전라남도에만 신사를 많이 세웠다. 전국의 신사 신사(神社) 신사(神祠) 경기도 5 67 충청북도 2 16 충청남도 7 30 전라북도 10 20 전라남도 8 226 경상북도 5 47 경상남도 7 37 황해도 2 27 평안남도 2 21 평안북도 4 37 강원도 2 35 함경남도 2 20 함경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9일 0시 조금 지난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마음이 심히 복잡했다. 장준하와 박정희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의 삶을 따라야 하는지. 장준하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킬 것인가? 장준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 둘의 삶은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언론인이며 반독재민권운동가인 장준하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광복군 장준하는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고국으로 환국했다. 그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면서부터 해방이 되고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할 때까지는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데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53년 3월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1958년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글로 필화사건을 맞았다. 탄압에 맞서 다음해 2월호는 권두언을 백지 상태로 발간해 친일파를 등에 업고 독재를 일삼는 이승만 정권을 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최근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가운데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출범 기자회견이 오늘 11시 30분 교육부 앞(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열렸다.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는 항일독립운동가기념사업단체연합회, 흥사단, 한국YMCA전국연맹, 참교육학부모회, 학술단체협의회. 역사정의실천연대 등 전국 465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 반대 시민연합체다. ▲ 온 나라 465개 단체가 참여하는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가 출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 인사말과 규탄발언을 하는 한상권 대표, 이이화 선생, 이영주 수석부위원장, 김원웅 회장(왼쪽부터) 기자회견은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했고, 역사학계 원로이며, 전 동민농학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 선생의 일본인들이 일본어를 국어로 지칭한 것을 마치 한국어를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독재자 이승만을 추앙하는 교과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규탄발언이 이어졌다. 또 김원웅 항일독립운동가기념사업단체연합회장은 교학사 교과서는 일본 후쇼사 교과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본래 대한民으로서 차라리 죽을 지언정 일본民 되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이 독립을 외친 것이 무슨 법에 맞는 다는 것인가 -이상동 판결문(고등법원, 1919년 5월 12일)- *이상동(李相東)독립투사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51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