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삼형제 아들이 모두 죽어 이제 며느리들이 독신이 되었다. 큰아들은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상옥(김상옥 의사)은 객지로만 다니다가 밥 한 그릇 못해 먹이고... 왜 왔드냐? 왜 왔드냐? 거기(상해)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이는 독립운동가 탄압의 본거지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지사(1861-1941, 1995년 대통령표창)의 이야기다. 1923년 1월 22일 밤 8시, 김상옥(1889-1923, 1962년 대통령장) 의사는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동일당이란 간판집 모퉁이에서 창문을 향해 폭탄을 힘차게 던졌다. 순간 천지를 진동하던 굉음은 그간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조선인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소리요, 피맺힌 절규와도 같았다. 김점순 지사의 금쪽같은 아들 상옥은 이렇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을 나라에 바쳤다. 막내아들 김춘원(1990, 애족장)도 그렇게 형 김상옥을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필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나라 안팎을 찾아다니다가 오래전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가 김점순 지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2년 전(1923년) 오늘은 김상옥 의사가 천여 명의 일제 경찰을 상대로 싸우다 순국한 날입니다. 의사는 당시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검거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신출귀몰한 모습으로 경찰을 따돌립니다. 그 뒤 삼판동(오늘의 후암동)에서 일전을 치른 다음 또다시 포위망을 뚫고 효제동 동지의 집에 숨었습니다. 이후 의사의 은신처를 찾은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사백여 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 무렵 김 의사가 숨은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지요. 이에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집들의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무장결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조국독립의 염원을 담은 의사의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대한 남아의 기백을 여지없이 떨친 의사에게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10여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지자, 마지막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지요. 당시 나이 34살이었던 김상옥 의사는 일제 경찰과 총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6년 김지운 감독, 송강호, 공유, 한지민, 츠루미가 출연한 영화 <밀정>이 상영되어 관객수 750만 명을 달성하는 성황을 이뤘습니다.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속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이 중심이 되어, 폭탄을 준비하고 일제의 주요 기지를 겨냥했던 실화에서 출발했지요. 영화에 등장하는 정태산이라는 인물은 실제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 단장을 본보기로 하고 있습니다.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김원봉의 주도 하에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였는데 의열단은 의로운 일(義)을 맹렬히(烈) 행하는 단체(團)라는 뜻입니다. 김원봉은 일본과 군대로는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암살과 파괴 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뒤 자기 뜻에 공감하는 청년들을 모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오늘(11월 9일), 지린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농가에 모여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했습니다. 비밀결사 조직인 탓에 의열단원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2010년에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 적진인 도쿄에도 5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종로구의 종로5가와 6가 사이 위쪽에는 효제동이란 곳이 있다. 북쪽으로는 이화동(梨花洞), 동쪽으로는 충신동(忠信洞)ㆍ종로6가, 남쪽으로는 종로5가, 서쪽으로는 연지동(蓮池洞)과 접해 있는 지역인데 지금부터 99년 전인 1923년 1월 22일 이곳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동네의 이혜수란 사람의 집에는 열흘 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34살의 한 청년이 숨어들어 있었는데, 추적하던 일본 경찰이 새벽에 이 청년의 은신처를 알고는 무장경찰 4백여 명을 동원해 이 씨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던 상황이었다. 이에 이 청년은 지붕 위로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일본 경찰과 지붕을 타고 다니며 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여 많은 일본경찰이 죽거나 다쳤지만, 탄환이 다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자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열흘 전 청년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은, 당시 종로경찰서가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압, 압살하여 한국인들의 원한의 상징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탄으로 일본 경찰이 직접 죽거나 다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