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윤지영 기자]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최병구) 분관인 한양도성박물관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한양도성 훼철, 한양의 경계를 허물다> 기획전시를 ’26년 3월 8일(일)까지 연다고 밝혔다. 기획전시는 ‘일본에 의한 한양도성 훼철’을 주제로 한양도성 훼철의 시작, 식민통치를 위한 도시계획, 한양도성 위에 세워진 시설물, 경계가 허물어진 한양으로 구성된다. 한양도성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다. 도성에는 8개의 성문과 2개의 수문이 있었으며 전체 길이는 약 18.6km에 달하였다. 한양도성은 수도와 지방을 구분하는 물리적 경계이자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고, 한양도성은 일본의 침탈과 근대화가 맞물리며 훼철되기 시작했다.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설치된 성벽처리위원회는 숭례문, 흥인지문, 오간수문, 소의문 부근의 성벽 철거를 결정하였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한양도성은 일본의 도시계획 사업과 식민통치 시설물 조성 등으로 훼손되었고, 서울의 도시공간은 식민지 정책에 맞는 형태로 바뀌었다. 1915년 돈의문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9)는 국치일(國恥日)이었다. 국치일이란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곧,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국권을 강탈당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던 ‘모든 것’을 강탈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있던 모든 것이란 ‘숨 쉬는 것’만 빼고 모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숨 쉬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으니 생사여탈권을 모두 빼앗긴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의식주 가운데 의생활을 담당했던 면화도 그 ‘강탈’ 가운데 하나다. <목포근대역사관1관> 2층에는 일제의 면화 침탈의 시작을 알리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는 비석이 있다. 비석 글씨는 조선제 6대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재임 1931~1936)의 글씨다. 이 비석 뒷면은 '明治37年(1904년)에 목포주재 대일본제국 영사 와카마츠 도사브로(若松兎三郞)가 고하도에서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를 시작했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비석의 원본은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 고하도 선착장에서 원마을로 가는 들머리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2012. 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