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오는 12월 4일 저녁 7시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17. ‘정조테마공연장’에서는 <칼검(劍)ㆍ춤무(舞)> 화성행궁(華城行宮) 봉수당(奉壽堂) 검무(劍舞) 찾기 그 두 번째 걸음 공연이 열린다. 진짜 조선 정조의 꿈이 깃든 춤. 230년 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진찬'이라 불린 큰 잔치를 열었다. 그날 무대에 처음 오른 춤이 바로 검무(劍武)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칼춤을 추는 두 여인의 그림과 함께 검劍무舞'라는 이름이 또렷이 남아있다. 조선 왕실 공식 기록에 이렇게 명확히 남은 검무'는 이때가 유일하다. 이 춤은 단순한 칼춤이 아니라, 정조가 효심ㆍ무예ㆍ왕권ㆍ민심의 조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무대였다. '검무'는 곧 정조가 꿈꿨던 새로운 시대의 지도력 선언이었다. 또 정조에게 화성은 각별한 도시였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곳이자, 새로운 정치 중심지로 삼고자 한 자급자족의 도시였다. 화성행궁에서 열린 진찬과 검무 공연은 왕실과 백성, 상인, 유생, 군사들이 함께한 통합의 무대였다. 정조는 실용적 통치를 추구한 군주로, 《무예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소중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구차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1796년) 11월 9일 기록으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을 펴냈음을 날리고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 ‘화성(華城)’을 쌓은 경위와 제도ㆍ의식을 기록한 책입니다.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에 걸쳐 쌓은 화성성곽은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김종수(金鍾秀)에게 명을 내려,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해 11월 9일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801년(순조 1) 9월에 인쇄하였습니다. 화성성곽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무덤을 1789년(정조 13) 10월 화산(花山: 지금의 융건릉)으로 이장한 뒤 3년에 걸쳐 쌓은 곳으로, 전체 길이 5.4km가량의 조선시대 축성기술이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소장 김미란)는 오는 10월 11일 낮 3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인 화성 융릉과 건릉(경기 수원시)에서 <융건릉 음악회 – 옛 그림 속에서 정조를 만나다〉를 연다. 이번 행사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의 이야기를 담은 옛 그림 속 장면을 영상ㆍ음악ㆍ무용으로 재현하는 융복합 공연이다. 특히, 혜경궁 홍씨 회갑을 기리고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한 과정을 기록한 8폭 병풍 「화성능행도」와 정조가 직접 그린 「국화도」를 비롯해 김홍도 등 정조 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을 전문 해설과 함께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어 관객에게 특별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공연에서는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 10돌을 기려 작곡된 국악실내악단의 창작곡과 함께,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그린 「봉수당진찬도」(보물)에 등장하는 북춤 ‘무고(舞鼓)’와 궁중 연례에서 추던 ‘처용무’ 등을 생생히 재현한 국립국악원 무용수들의 궁중무용을 감상하며 섬세한 멋과 예술미를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미술평론가 손철주가 해설을 맡아 「낙남헌양로연도」에 담긴 유교적 경로 사상 등 정조 시대 회화에 담긴 다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수원시(시장 이재준)가 수원화성문화제의 대표 야간 프로그램 ‘야조(夜操)’를 3년 만에 다시 선보인다. 올해 야조는 10월 3~4일 수원화성 동북쪽 ‘연무대’에서 열린다. 시민 공연가들과 함께 무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야조는 1795년 정조대왕이 능행차 중 수원화성 서장대에서 호위 부대 ‘장용영’을 친히 지휘하며 펼친 야간 군사훈련이다. 야조를 주제로 기마 무예ㆍ군무ㆍ병법 시연 등 전통 콘텐츠에 워터스크린ㆍ특수효과ㆍ미디어 맵핑ㆍ불꽃 연출 등 첨단 무대 기술을 결합한 공연을 볼 수 있다. 연무대를 배경으로 전면이 개방된 슬라이딩 무대와 함께 4,000석 규모의 객석을 입체적으로 배치한다. 관람석에서 마상무예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역동적인 영상과 음악도 더해져 관객들에게 깊은 몰입감과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야조 공연에는 시민 200여 명이 상궁, 대신, 장군, 군사 등의 배역으로 참여한다. 수원시는 무대에 설 시민 배우를 8월 22일까지 모집한다. 참여를 원하는 시민은 수원화성문화제누리집>축제 정보>‘공지사항’에서 신청하면 된다. 수원시 관계자는 “야조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정조(正祖). ‘바를 정(正)’자를 쓴 묘호에서 보듯이 정조는 ‘바른생활 임금’이었다. 정조가 남긴 글이나 생각을 보면 늘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빈틈없이 살려 했던 ‘반듯함’이 느껴진다.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극기(克己)가 없으면 감당하지 못하는 막중한 군주의 자리를, 마치 군주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 양 소화해 냈던 임금이 정조였다. 정조의 말과 생각을 담은 이 책, 《정조의 말》은 규장각 신하들이 기록한 정조 어록집인 《일득록》을 지은이 정창권이 풀이해 쓴 책이다. 《정조처럼 소통하라》라는 책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고 《일득록》을 읽으며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줄 만한 대목을 가려 뽑았다. 《일득록》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의 161권부터 178권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문학 5권과 정사 5권, 인물 3권, 훈어 3권 등 모두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소 가까운 거리에서 정조를 보좌하던 규장각 신하들이 보고 들은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정조가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고 깨우치기 위해 편찬하도록 명했다. 《일득록》에서 보이는 정조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부지런했다. 정도전이 나라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정조는 백성을 사랑한 나머지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제도로 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도록 했습니다. 상언은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것이고, 격쟁은 임금 행차 길에 백성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최근 수원시는 백성의 목소리의 귀 기울이며 어려움을 꼼꼼하게 살폈던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을 계승한다며 지난 5월 1일부터 오는 8월 11일까지 ‘폭싹 담았수다! 시민의 민원함’을 운영한다고 밝혔습니다. 조선시대에 보면 정조 임금뿐 아니라 세종은 당시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을 꿰뚫고 있었으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님을 잘 알고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세종은 안건이 올라오면 마지막에는 자기가 결정하더라도 신하들이 충분히 갑론을박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제21대 이재명 대통령이 국회에서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직전의 대통령은 회의 때도 1시간 가운데 55분 이상을 혼자 말하는가 하면 조금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1793년) 5월 25일 기록에는 “임금이 채제공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임명하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정조 개혁의 중심에 섰던 인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한 뒤,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도승지ㆍ병조판서ㆍ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을 지낸 인물입니다. 10여 년을 재상으로 있는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임금을 보필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정조는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 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하면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우국지사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임금이 쓴 글을 다듬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라고 애통해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는 채제공의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는 경기도의 유형문화유산으로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장원급제 김명육이요~!” 장원급제(壯元及第)! 과거를 치르러 모여든 숱한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의 영예를 차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1797년(정조 21) 음력 12월 5일, 제주에서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하여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러진 감제시(柑製試)의 장원은 유학(幼學, 벼슬하지 않은 선비) 김명육(金命堉)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마 김명육, 그의 입꼬리는 기쁨으로 치솟다 못해 찢어지지나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김명육의 인생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를 급제시킨 독권관(讀券官, 과거시험을 담당한 고시관) 이병모(李秉模, 1742~1806)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에게 다음과 같은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렸던 것입니다. “신(臣)이 김명육의 시험지를 자세히 보니 운율이 어긋나고 대구가 맞지 아니하여 일정한 격식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글자체가 기울고 비뚤어져서 글씨가 괴이함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신은 정신이 모두 나가서 혼동한 나머지 우등으로 매겼습니다. 지금 문체를 바로잡고 필법을 바르게 하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시권은 결코 유생들에게 반시(頒示, 반포하여 보이는 일)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22년 10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정조대왕(1752~1800) 탄신 270돌을 기려 ‘독서대왕 정조의 글과 글씨’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세종대왕, 영조 임금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정조대왕은 수원화성을 쌓고 신도시 수원을 건설해 우리에게 물려준 위대한 군주였는데 이 전시회로 우리는 정조대왕의 삶과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전시회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정조의 대표 유물인 《홍재전서(弘齋全書)》 100책이었지요. 독서로 글짓기의 기초를 다진 정조는 나라 경영에 대한 자기 생각과 마음을 담은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가족과 신하를 위해 지은 글도 많은데 이를 모두 모아 만든 문집이 《홍재전서》입니다. 유난히 책을 사랑하며 학문정치를 추구했던 정조의 삶과 철학이 이 책에 담겨있습니다. 모두 184권 100책으로 이루어진 《홍재전서》는 조선 역대 임금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이며, 펴낼 때 쓴 금속활자는 정조 때에 만든 정리자(整理字)입니다. 내용은 시문뿐만 아니라 신하들과의 응답, 해당관서의 기록에 대한 최종 판결, 재위 기간에 펴낸 서적의 해제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이 다수 포함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 해가 새로 바뀌어 낮이 점점 길어지고 양기가 돌아와 만물이 화기를 머금고 있는 이때 만백성을 위해 자나 깨나 말없이 축원하는 것은 농사가 잘되라는 것이다. (가운데 줄임)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이 편안해야만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이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이치로서 혼연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비손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1791) 1월 1일 치 기록으로 정조 임금은 “백성이 편해야 나라가 편하다.”라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정조는 “농사철을 빼앗지 말고 생업을 흔들지 말며 수시로 살펴서 도와주는 것은 지방관의 직분이고, 볕이 나야 할 때는 볕이 나고 비가 와야 할 때는 비가 와 낮은 데는 습하지 않고 높은 데는 메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라며 지방관을 독려하고 자신에게도 다짐합니다. 지난해 연말 우리는 갑작스러운 계엄령과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로 인해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고, 내일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그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