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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나라가 망함에 순국으로 책임을 다하려 한 이만도 선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15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을 당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자정순국한 분들 가운데 향산 이만도 선생이 계십니다.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살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한 곳으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지요. 선생은 24살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관직을 지냈습니다.

 

   
▲ 을사오적을 극형에 처하고, 을사늑약을 철회하라는 향산 이만도 선생의 상소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

그러나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요. 낙향하여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가운데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광무황제(고종)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오자, 안동지역에서는 통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하고,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섰습니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아들 이중업을 통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고 이를 통해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일제의 정책을 단호하게 거절한 광무황제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9월 17일 단식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나라를 잃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던 선생은 단식 24일째 되던 날 순국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되새기는 제76회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 햔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