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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북간도 독립운동의 선구자 "김약연 선생"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으로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 오삼열, 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 규암 김약연 선생

1908년에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숙감(塾監)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연변교민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에는 여 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 등 38인과 함께 3·1독립선언서보다 빠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1919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체로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조직하여 의사(議事)부원으로 김병흡(金秉洽)·고용환(高龍煥)·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동년 3월 13일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개최한 대한독립선언대회를 정재부(鄭在負) 등과 주도하였으며 동년 3월 또한 노령(露領) '니코리스크'에서 개최된 대한독립선언과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에 북간도 대표로서 참석하여 일제에 대한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2월 26일에는 24처 지방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간도주민대회를 개최하여 간도에 거주하는 30만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보호를 위하여 자치권(自治權)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내용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일제는 그를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자(首領者)'로 또는 100만 동포의 대표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