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성제훈 기자] 저는 책 읽기를 즐깁니다. 침대 머리맡, 소파, 식탁, 화장실 등에 책을 널어놓고 닥치는 대로 읽습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덮어두기도 하고, 읽다가 다른 책이 생각나면 책장에서 뒤져 그 책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엎어져서 읽기도 하고, 누워서 읽기도 하며, 화장실에서는 앉은 채 읽기도 합니다.
▲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김영조, 얼레빗)》 표지
이번에 읽은 책은, 책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서 책 읽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읽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자세로 책을 읽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세를 바로잡은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습니다. 심지어 책을 두 손으로 들고 읽은 곳도 있습니다.
이번에 본 책은, 글쓴이가 2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명문 종가를 탐방한 것을 엮은 책입니다. 글쓴이가 본 나눔을 실천한 기준은 ①곳간을 열어 굶는 이들을 구휼했는가, ②사재를 털어 교육사업을 했는가, ③재산이나 온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는가 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종가를 찾아 멀리 전라남도 해남에서부터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달려가 들었던 이들 종가의 ‘나눔을 실천한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 책입니다.
나눔과 베풂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전국을 뒤졌는데, 뜻밖에도 글쓴이가 정한 기준을 충족하는 종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가운데 22곳의 종가를 찾아내 발로 글을 썼습니다.
이 책을 쓴 김영조 님은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으로 2004년부터 날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는 문화편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예전엔 오마이뉴스에 ‘김영조의 민족문화 바로 알기’를 800여회 연재했고, 지금은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우리문화신문(www,koya-culture.com)을 만들어 발행인 겸 편집인을 하면서 우리 문화의 아름다운 속살을 알리는 데 힘쓰고 계십니다.
책의 차례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부 가난 구휼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다
01 부녀자 걸인에겐 의관정제하고 구휼하다(의성 만취당 김사원 종가)
02 굴뚝을 섬돌 밑에 내어라(구례 운조루 류이주 종가)
03 가뭄 때 200석은 내놓고, 50석은 종자로(나주 남파 박재규 종가)
04 극심한 기근에 사재 털어 취로사업(진주 용호정원 박헌경 종가)
05 흉년에 구제받은 백성들, 나라에 “선행 기려달라” 간청(영덕 만괴헌 신재수 종가)
06 650년 선비정신과 베풂을 실천한(순창 양사보 종가)
07 세금 대납하고 옥살이 풀어주길 세 차례(해남 녹우당 고산 윤선도 종가)
08 누에는 치지 말고, 나락은 길가에 쌓아두어라(논산 명재 윤증 종가)
09 흉년에 곳간을 모두 열다(강릉 선교장 무경 이내번 종가)
10 전 재산을 구휼과 의병 지원, 차용증서 모두 불태워(예천 별좌공 사고 이덕창 종가)
11 도토리죽 쑤어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다(영양 석계 이시명(장계향) 종가)
12 문경현감 시절 본가에서 곡식을 날라다 빈민 구휼(홍성 사운 조증세 종가)
13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경주 최부잣집 문파 최준 종가)
14 과감한 상소문으로 백성 살린 청백리(풍기 금계 황준량 종가)
제2부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모든 것을 바치다
01 안동에 동창학교 세우고 만주에선 신흥무관학교 세워(안동 백하 김대락 종가)
02 퇴계를 이은 큰학자 학봉 선생 종가 왜놈에 맞서(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
03 나눔과 민족교육을 실천한 관선정(보은 남헌 선정훈 종가)
04 100년 전 설립한 백산상회, 상해임시정부 자금줄(부산 백산 안희제 종가)
05 을사오적 처단 상소 올리고, 24일 단식 끝에 자정순국(안동 향산 이만도 종가)
06 나라 독립에 재산과 목숨을 다 바치다(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 종가)
07 사재 털어 교육사업, 초가종택의 청빈한 삶(서천 청암 이하복 종가)
08 가난구휼에 앞장서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의병총사령 되다(군산 돈헌 임병찬 종가)
책에서 몇 구절 따오겠습니다.
▲ 돈을 갚지 못하여 토지문서를 들고 오면 그 자리에서 갖고 있던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던 김사원 선생의 만취당 종택
▲ 종택 가운데는 기와가 아닌 초가 종택도 있다. 평생 초가에서 청빈하고 살면서 교육사업을 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7호 서천 이하복 선생의 종택.
김사원 선생은 양식을 꾸러 오면 차용증을 쓰게 했는데 갚지 못하고 토지문서를 가져왔을 때는 그 자리서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차용증을 쓴 것은 빌려간 곡식을 갚는데 게으르지 마라는 뜻이지 논밭을 뺏기 위함이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라고 위로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9~20)
고산은 말로만 후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었는데 언제나 가난한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84살에는 ‘의장(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농장)’을 마련하여 의곡을 보관해두고 극빈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선비로서의 삶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일생을 보낸 사람이 윤선도 선생이었다.(107)
“또 명재고택에서는 누에를 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건 부자가 양잠까지 손을 대면 가난한 사람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119
▲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섬돌 밑으로 낸 운조루(왼쪽), 낮게 낸 남파 박재규 종가
▲ 여중군자 장계향 선셍이 도토리죽을 쑤어 가난한 이를 구했던 "樂飢臺" 비위
대담 끝에 관장은 “예전엔 농민이 근본이었듯이 지금 같은 산업사화에선 근로자가 근본입니다. 우리가 농민과 상생했듯이 지금은 재벌이 좀 더 융통성 있게 처신해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현대사회에 뼈아픈 질책이었다. 동시에 관장은 우리 어머니들이 위대한 모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요새는 대리만족을 위한 지나친 교육열에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도 주문했다.(143)
요리는 식품화학을 이해한 바탕위에서 하는 과학의 영역이라고 한다. 특히 요리 전문가들이 평하길 ‘음식디미방’은 조선시대 중기 요리과학의 수준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책이며, 상당히 과학적인 조리법에 따라 씌어졌다고 말하고 있다.(171)
언론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얘기할 때 미국의 워런 버핏을, 자녀교육을 얘기할 때 중국 맹자를 흔히 예로 든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자녀교육에 관한 한 워런 버핏이나 맹자보다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훌륭한 장계향 선생이 바로 우리곁에 있기 때문이다. 이돈 선생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난 나는 낙기대 앞에서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장계향 선생처럼 배고픔을 즐길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173)
이 넓은 고택을 지키고 사는 철학을 묻자, “고택에 관람객들이 오면 관광지도 아닌데 대부분 집만 구경하고 갑니다. 사실은 이 종가가 이어져 내려오기까지의 철학이 더 중요할 텐데도 말입니다. 오시는 분들이 외적인 문화보다는 내적인 문화를 체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언제나 문을 열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지요.”라며 환하게 웃는다.(185)
“앞으로 점점 고택을 보존하기 어려워질 것 같아 여기 계속 사는 조건으로 재산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들 대에 가서라도 살림이 어려워져 담보 대출 등을 받아 처분이라도 하는 날이면 종가를 이어오신 선조를 뵐 면목이 없을까 해서지요.”(185)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종가”를 쓰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는 과정에서 만난 어떤 종가는 ‘적선’을 크게 실천했다고 알려졌지만 만남을 거절했다. 하지만 학봉종가는 달랐다. 숱한 사람들이 종손을 만나자고 요청했을 것이고 그때마다 귀찮기도 하련만은 종손은 겸손하게 말한다. “종가의 재산이 사유재산이 아닌 것처럼 종손도 개인이 아니라 이미 공인이기에 대담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248)
아직 미혼인 아들의 며느릿감에 대한 생각도 밝힌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제 아들을 택하는 며느리에게 제가 살았던 삶을 그대로 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에게 전문직 여성을 선택하는 것도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충분히 자신의 삶을 살다가 제가 더 이상 이 일을 못하게 되면 그 때 제 뒤를 잇는 것도 좋을 것 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아들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앞으로 맞이할 며느리의 삶을 존중할 줄 아는 현명한 종부의 마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259)
이곳 종택을 영어로 ‘H형’가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집의 구조를 알파벳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한자 공(工)자를 써서 ‘工자형’주택이라고 해야 맞다.(263)
요즘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늘리려고 온갖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당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석주 선생의 실천적인 삶은 정말 보통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야 말로 진정으로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제대로 실천한 사람이 아닐까? 이 시대에 과연 그런 사람이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304)
▲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온 재산과 온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
만주로 떠난 석주 선생은 광복 후에 호적도 없었다. 그러다 법원의 판결로 석주 선생의 호적이 다시 부활되었지만 정부는 단순히 법만 개정하고 나머지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팽개쳐 이후 변호사 비용 등 무려 500만원 가까운 비용을 들여서야 호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정부는 나라를 빼앗긴 적국치하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호적이나 재산상의 문제를 찾아 정리해줘야 하는 기구를 두었어야 했는데 이러한 것을 모두 개인에게 맡겼으니 힘없는 후손들이 살아낸 지난한 과거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일이리라.(304)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그 후손들이 풍찬노숙을 해야 하고 고통을 받는다면 앞으로 그 누가 나라를 위해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릴 것인가? 종가 이야기를 쓰면서 어떤 종가보다도 더 큰 나눔을 실천했으면서도 큰 고통을 받았던 임청각은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뚫어 놓았다. 다른 종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십, 수백 개를 헤아리는 장독 하나 없음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모든 국민이, 배달겨레가 우리의 임청각을 찾아 독립운동의 처절한 역사적 사실에 귀 기울일 때에만 그 구멍은 메워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307)
이 책은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의 철학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그간 나온 고택 위주나, 종가집에 내려오는 음식 등을 다룬 책들과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우리나라에 수백 년 내려오는 종가는 많을 겁니다. 그 종가는 모두 나름대로 종가다운 역사가 있겠죠. 아마도 대부분 그럴 겁니다. 그 많은 종가 가운데서 나눔을 실천했던 종가는 그리 많지 않다고 김영조 글쓴이는 지적합니다.
책장을 넘기면 행간마다 가득한 나눔 정신이 책을 읽는 저를 창피하게 만듭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그 후손들이 제대로 대접 받기는커녕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글쓴이 말따라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뚫어 놓았’습니다. 아마 당분가 쉬 가지지 않을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김영조, 도서출판 얼레빗,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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