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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산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 오는 나머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일까요? 문득 선생님이 사신 서른세 해가 깊고 높은 뜻을 펼치기에는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으로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삶을 사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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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중국 옌안 시절의 김산 |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여 전이었습니다. 미국의 기자 출신 작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Song of Ariran’에서, 망국의 한을 안은 한 젊은이의 짧고도 치열한 삶을 처음 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받은 충격은 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고수해 왔던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바뀌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사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생애가 실체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이외에도, 님 웨일즈의 표현대로 ‘현대적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이라는 극찬과 일치하는, 혁명가의 삶을 살아 냈다는 사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찍이 선생님은 1920년 15세에 조선신흥무관학교(朝鮮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한 이래, 독립운동을 전개한 끝에 생명의 위협에 노출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항상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실천적 혁명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은 이론이면 이론, 실천이면 실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진 이들이 대부분인데 반해, 선생님의 생애는 이론과 실천을 조화롭게 겸비한 덕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921년에는 안창호 선생의 소개로 천진의 남개대학(南開大學)에서 학습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22년에는 북경협화의과대학(北京協和大學)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또한 1925년에는 광저우로서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등 일생에 걸쳐 학구열을 보이는 실천적 지성으로서 조국 독립에 헌신했습니다.
여담으로 님 웨일즈가 자신의 책에서 밝혔듯이, 두 분의 인연은 도서관에서 처음 맺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작가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 영문 서적들이 한 조선인의 이름으로 이미 대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궁금한 나머지, 그곳에 근무하는 사서를 통해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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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발간된 영어판 아리랑의 초간본표지 |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36년 항일홍군대학(韓日紅軍大學)에서 강의를 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37년 장정(長征)을 거쳐 항일홍군대학이 정착한 연안(延安)에서 교수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무렵 장정을 끝낸 중국공산당은 극심한 내부 투쟁을 통한전열 정비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혁명가들이 일제 및 국민당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자비하게 생명을 빼앗기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조선인 출신 독립 운동가들도 안타까운 광기의 역사에 희생된 사실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38년 마침내 운명의 해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때 중국 공산당의 첩보활동을 주도하던, 중앙정보부장과 사회부장을 겸임하던 캉셩(康生)이 앞장서서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같은해 10월 8일 선생님은 일제의 간첩이라는 오명을 쓰고 비밀리에 처형되는 비운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45년 만인 1983년, 당시 후야오방(胡躍邦) 총서기의 주도하에 복권이 되어 혁명열사의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선생님의 처형에 앞장섰던 캉셩은 문화대혁명의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적 심판을 받아, 1980년 당적을 박탈당하고 혁명열사 묘지에서 쫓겨났다고 하더군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해야겠지요.
2005년 뒤늦게나마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해서 선생님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선생님, 대한민국은 다가오는 2019년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도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힘을 실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 드리며, 이만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
석 민 정
현 비원문화원 원장
문화 예술인, 환경 운동가, 한국 전통문화 연구가 , 자연치유 연구가, 세계평화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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