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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님의 영전에 올리는 글 -최범산-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항일독립 전쟁사(抗日獨立戰爭史)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오동진 장군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어찌 몇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동진 장군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혈맥으로 흐르던 서간도 일대, 무명 독립군들의 피와 땀이 서린 항일유적지에서 몇 마디 흠모의 외침만으로 선열들의 이름을 어찌 가벼이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굴종의 침묵 보다 더 부끄러운 망각으로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 애국선열의 업적을 올바로 기리지 못한 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고, 아직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오늘에 백절불굴의 항일명장(抗日名將) 오동진 장군님을 우러러 백년편지를 올립니다.


“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 사령(司令)이 되었다.” 1932년 3월 5일이었지요.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장군님이 왜놈 검사와 판사, 법정을 가득 메운 왜인 방청객들, 친일파들을 향해 일갈하신 말씀입니다. 교만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의 재판장을 압도한 장군님의 기개는 왜놈들의 간담을 송두리째 뭉개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일제의 간계와 교활함으로 재판정에 서게 되신 장군님께서는 33일 동안 단식을 하시며 일제의 재판의 부당성을 외치며 완강하게 거부하셨지요.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민족반역자, 매국노들에게 강탈당한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셨던 장군님께서는 대한국인(大韓國人)의 자존과 기개로 의연하고 당당하게 싸우면서 왜놈들의 법정에 서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본인 검사, 판사, 친일변호사들에 의해 꾸며진 각본대로 죄목이 나열되었습니다.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총영장으로서, 통의부, 정의부 항일독립군 사령으로 당당하게 투쟁하신 오동진 장군에게 무기징역이 언도되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일본인 판사를 향해 크게 웃으시며 꼿꼿한 자세로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오동진 장군은 옥중에서 상고를 거부하시고, 왜놈 간수들 앞에서도 추호의 굴함이 없으셨고, 언제나 위풍당당하신 독립군 사령이셨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군과 사무라이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의 죽음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의 거의(擧義)로부터 시작되었던 국권수호투쟁.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경술국치 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독립전쟁의 결과로 맞이한 조국광복, 그  기쁨의 깃발을 흔들던 것이 엊그제 같은 데 어느 새 70년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일제의 억압과 수탈의 시대. 고난과 시련 속에서 끝없이 전개한 항쟁의 역사, 항일애국지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독립한 나라에 살고 있건만, 어리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준 독립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탐욕으로 그었던 38선,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실조차 망각한 채 말입니다.


 오동진 장군님을 비롯한 순국선열들의 영전에 서서 분단과 대립과 갈등으로 민족분열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반성하며 우리들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일독립전쟁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으며, 항일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업적과 애국애족정신을 얼마나 기리며 살고 있는가. 또한  통일을 향한 진정성을 가지고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항일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 국권상실의 시기 올곧은 민족정신의 횃불로 밝혔던 항일독립전쟁의 역사,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발자취, 뜨거운 조국애는 우리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역사의 진실인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에 맞서 불굴의 용기로 싸웠던 항일독립정신은 한민족의 빛이요 혼불입니다. 한민족 정신의 빛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혼불은 영원한 생명으로 민족을 이끕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마치 조국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자신을 위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이기적인 삶의 물질적 시대에는 순국선열의 역사를 배우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항일투사들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지 않고, 항일유적들이 훼손되고 사라져 가는 일에 무관심하더라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조차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끼며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후손들(역사와 민족 앞에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 자들)이 친일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권력과 부를 누려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그저 개인의 욕망과 영달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역사에 무지하고, 불의에 무감각하고, 친일반역자와 그 후손들의 세력(정치, 경제, 교육, 법조계 등에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 친일사대반민족 세력) 앞에 굴복하듯 허위적거리면서 무능하게 70년 세월을 살아왔음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반성합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오동진 장군님과 항일독립투사들의 위대한 발자취가 살아 숨쉬고 있는 서간도 일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북간도 일대, 러시아 연해주의 항일유적을 답사하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항일애국영령들의 영전에서, 국치(國恥)와 국권상실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투쟁하신 항일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삶을 발견하면서 오늘의 우리들의 부끄러운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만주 일대 곳곳에 뿌려진 무명선열들의 피와 눈물의 현장을 발굴하면서 그분들의 영전에 감히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일독립전쟁의 유적을 답사하며 갖은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독립투사들의 고난의 삶을 생각하며 이겨내게 되었습니다. 광활한 중국의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 충돌하면서 서간도 일대 항일유적답사기 『압록강아리랑』  북간도 항일유적답사기 『두만강아리랑』을 집필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투사들의 고난과 역경의 삶을 떠올리며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였습니다.



 만주지역 항일독립전쟁의 유적에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과 고귀한 희생이 서려 있었기에 어찌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사로움으로 유적 답사기를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순국선열들의 피눈물이 서린 항일유적의 발굴과 보존활동을 어찌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오동진 장군님의 영전에 엎드려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었던 장군의 발자취를 떠올려 봅니다.


 장군님께서 태어나신 곳, 압록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장으로 소문이 났던 청수동(淸水洞), 장군님의 고향은 지금도 한민족의 피를 나눈 동포들이 변함없이 살고 있건만, 남녘에 사는 우리들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분단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미어져 내리는 아픔, 분단의 슬픔으로 압록강 건너 청수동만 바라봅니다.


 조국독립을 위해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총영을 창설하셨던 관전현 안자구(安子溝),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본부 유적지 홍통구(弘通溝)의 산과 들에는 항일기념비는 커녕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항일투쟁의 역사조차 모르는 중국인들이 살고 있고, 관전현 소구산촌 6소대라는 이름으로 변해버린 채 조선족 동포들도 떠나버린 마을이 되었습니다.


 중국 단둥시에서 북쪽으로 수풍댐을 향해 압록강변을 따라 1시간 정도 올라가다보면 오동진 장군님의 고향이 강 건너편으로 손에 잡힐 듯 바라보입니다. 조선국민회나 광제청년단 동지들이 모여 항일투쟁을 논의하던 청수동회의 장소 등은 직접 가서 볼 수가 없지만, 장군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흠모의 마음을 강물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굽이굽이마다 통일의 염원을 새겨놓고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오동진 장군님은 1914년 평양 숭실학교 출신 장인환이 중심이 되어 창설한 조선국민회에 배민수·김병두·김석헌·노선경·이보식·최달형과 함께 참여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항일계몽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미년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후 일본경찰의 협박과 회유, 끝없는 추적을 받으시면서도 결코 일제에 굴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인사들이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친일로 돌아섰을 때 조국광복의 염원을 안고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망명하신 오동진 장군께서는 1919년 4월에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동지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셨습니다. 이어서 11월 2일에 단동에서 여러 동지들을 모아서 안동임시의사회를 창설하시고, 안병찬ㆍ김찬성ㆍ김승만ㆍ김시점ㆍ오학수ㆍ이춘근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설립하신 후에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에 매진하셨습니다.


 1919년 3월 1일, 맨손으로 전국에서 일어섰던 3.1만세의거의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이 있었습니다. 잔악한 일제에 맞서 무력항쟁을 준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독립의 길은 요원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광복군사령부와 총영의 창설하시고, 총영장의 중책을 맡으신 후 광복군을 이끌고 국내진격작전을 감행하시고 친일밀정제거, 독립자금 모금, 무기 구입 등의 활동으로 남만주 일대 항일무장투쟁을 이끄셨지요. 그 고난과 역경의 시간들 속에서도 장군님의 가슴을 불태웠던 것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독립의 열망이었습니다.


 광복군 사령부가 있는 관전현 향로구(香爐溝: 중국명 샹루거우) 일대와 관전현 안자구(安子溝) 일대에서 독립군을 훈련하고, 밤이 되면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작전을 수행하신 독립군의 지도자, 오동진 장군님께 어찌 우러러 존경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920년 7월 미국의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대한독립의 염원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안경신(安敬信) 의사 등 3명은 평양, 정인복(鄭仁福) 의사 등 2명은 신의주, 임용일(林龍一) 의사 등 2명은 선천, 김영철(金榮哲) 의사 등 3명은 서울로, 특수요원을 파견하였습니다.  


 안경신 일행은 안주경찰서 왜경을 사살한 뒤에 평양에 들어가 경찰서 신축 건물을 폭파했고, 정인복 일행은 신의주(新義州)역에 폭탄을 투척하여 파괴하였고, 임용일 일행은 선천(宣川) 경찰서를 폭파하여 독립의지를 세상에 알렸고,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총독부 관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 임무조는 총독부 폭파를 계획하던 중에 피체됨으로써 안경신 의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원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오동진 장군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 경찰의 끈질긴 추적을 받으면서도 독립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압록강 일대 벽동·삭주·후창·초산·무산 등의 경찰주재소와 관공서의 습격을 주도하였고, 친일밀정 제거와 국경경찰대 공격을 끊임없이 전개하셨습니다.


1922년에는 애국지사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과 협의하여 재만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대한통군부·한교민단·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셨고, 교통부장·재무부장·민사부장 등을 담당했으며, 1924년에는 군사부장 겸 사령장이 되어 남만주에 한인사회를 보호하고 친일악질분자들이 설립한 일본민회·보민회·일진회 등을 섬멸하는데 앞장서셨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양기탁·이청천·김동삼 선생 등과 함께 관전현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조직한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평안북도 초산경찰서의 추목주재소, 외연주재소, 벽동경찰서의 여해주재소, 차련관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민족 억압과 수탈에 앞장서고 있는 왜경과 친일주구를 제거하고 총독부 관리들을 응징하셨습니다.


 1925년 10월 1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이탁ㆍ김동삼ㆍ이유필ㆍ윤세용ㆍ현천묵ㆍ윤병용ㆍ김좌진 장군과 함께 국무원에 임명되셨습니다. 그러나 오동진 장군은 만주의 무장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국무원에 취임하지 않으시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오동진 장군님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으로는 만주지방 한인들의 생활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1927년 4월 1일 김동삼·이탁·김기풍 등과 함께 길림성 대동공사(大東公司) 내에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활동하시다가 현상금 10만 원이 걸리게 되어 일본경찰의 끈질긴 추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명장답게 일제 수뇌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몇 년 동안 계속된 국내진격작전과 의혈무장투쟁,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농민호조사를 운영하느라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지만, 국내외 동포들이 보내는 성금과 한인지역 후원금만으로는 독립군 자금과 영농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안북도 삼성금광의 주인 최창학(崔昌學)이 오동진 장군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고(일본의 간계에 의한 함정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동지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6년 12월 16일 장춘시내 약속 장소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제의 앞잡이로 배변한 김종원의 밀고로 신의주 악질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훗날 반민특위에서 사형을 언도받음)에게 피체되시는 통한의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오동진 장군님을 구출하기 위해 신의주 형무소, 평양감옥 등을 정의부 독립군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구출작전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철통경계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신학교 설립과 애국계몽운동, 조선국민회 활동, 광복군 총영, 통의부, 정의부 총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장군님의 항일투쟁의 업적과 조국과 민족의 사랑하신 민족정신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던 대한의 청년들이 3.1만세의거 후에 모여들었던 관전현 향로구,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광복군사령부 창설 유적지가 그 당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산등성을 오르는 좁은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됐고, 빨간 지붕을 머리에 이고 선 중국식 농가주택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광복군 사령부와 총영의 독립군들이 활동했던 유적지에는 안내표지석 하나 없이 점점 잊혀가고 있습니다. 독립된 나라, 대한의 후손들의 망각과 무관심으로 발길조차 닿지 않아 잡초가 우거지고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린 역사의 현장을 바라볼 때마다 어찌 후손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항일독립전쟁에 참전하신 순국선열들의 업적들의 높고 낮음을 어찌 견줄 수 있으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숭고한 희생정신의 크고 작음을 어찌 가눌 수 있겠습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오동진 장군님의 영전에 백년편지를 올리면서 작가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작금의 우리사회 세태를 고백하려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친일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정기를 올곧게 세우지 못한 채 대립과 갈등 속에 있습니다. 친일반민족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거나 사죄조차 하지 않고, 철면피하게도 친일반민족 행위자체를 부정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이 사회의 중심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제치하가 억압과 착취와 수탈의 시대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발전의 시기였다는 괴변까지 늘어놓으며 우리사회 정·재계, 교육문화계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친일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의 장기집권과 문민정부, 참여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친일반민족세력과 그 후예들의 후안무치한 행각 -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려는 행위들 - 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친일행위를 한 반민족 인사들과 그 추종자들이 저지른 행위를 은폐, 왜곡축소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앞장서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역사, 올곧은 민족정기와 자존(自尊)을 세우는 역사를 정립하려 않고 오히려 역사왜곡과 은폐에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미래가 어둡거나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순국선열들의 올곧은 민족정기가 국민들의 가슴에 메아리쳐서 친일잔재가 청산되고 역사가 바로 서는 시대가 곧 열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고, 미래의 주역이 되는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남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번영에 이바지하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일독립전쟁의 역사, 애국선열들의 불멸의 업적을 계승하고,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국민들이 강성하고 위대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오동진 장군님을 비롯한 애국선열의 영혼들이 조국과 민족을 음우하여 주시고, 통일조국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하옵니다.


 오동진 장군님의 영령이시여, 부디 영광된 조국의 하늘에서 영면하소서.



최 범 산(崔凡山)


작가, 항일유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