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새롭게 영토로 편입된 지역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녔는데 이를 기려 이곳이 자국의 영토임을 드러내는 비석을 세웁니다. 이 때
세운 비석들이 모두 4기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ㆍ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ㆍ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ㆍ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따위입니다. 그 가운데 해발 556m의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어느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심지어는
무학대사 또는 도선국사의 비라고 잘못 전해 내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을 새롭게 확인하고 밝혀낸 이는 바로 추사 김정희입니다.
조선의 대학자 김정희는 순조 16년(1816) 7월 무더위 속을 뚫고 북한산에 올라 그곳에 있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 탁본했습니다. 그 뒤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비문을 판독한 다음 그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뒷날 김정희는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황초령비와 북한산
순수비의 비문을 치밀하게 고증한 논문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병자년 가을에 내가 벗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글자가 있는
듯하여 (중간 줄임) 탁본한 결과 비석 몸체는 황초령비와 비슷하였고, (중간 줄임)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옛 빗돌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유물임이 갑작스럽게 밝혀져서 무학대사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깨뜨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확인해낸
추사야말로 진정 큰 학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