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치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해군일기(중초본)》 5년(1613) 3월 16일 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전 도사(都事) 전욱(全頊)은 근래 충홍우도(忠洪右道) 감시 초시관(監試初試官)으로서 본 고을의 친지 30, 40명을 사사로이 이끌고 와 과거에 합격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전 강릉 부사 박경업(朴慶業)도 강원도 시관으로서 시험 응시자 30여 명의 답안지 겉봉에다 ‘삼가 봉한다.[謹封]’고 손수 써서 알아 볼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초장(初場) 시험에서 합격된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된데다가 응시한 여러 선비들의 분노까지 사 끝내 과장을 파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종 9년1668) 12월17일에는 무과 낙방자가 관청에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과거가 공정성을 잃는 바람에 억울하다고 생각한 낙방자들이 불을 지른 것이지요. 더구나 정조 18년(1794)에는 "손으로 붓 잡을 줄 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분수없는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과거에 응시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보면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부정이 난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무원 경력이 전무한 사람을 청와대 행정관으로 앉히는 지금의 사태보다는 중하다 할 수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