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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국내 여성 처음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오르다

《오은선의 한 걸음》, 오은선, 허원북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2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에서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치고 ‘오은선’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 세계 여성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전부 오른 분이지요. 그리고 조금 더 아신다는 분이면 국내 여성 처음으로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오른 인물이라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 오은선 씨가 자신의 등정기를 《오은선의 한 걸음》이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저는 2011년도에 오은선 씨와 불암산을 함께 산행하면서 나눈 이야기를 월간중앙에 ‘오은선 대장과 불암산을!’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은선 씨가 책을 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14좌를 오르는 오은선 씨의 거친 숨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은선 씨는 너무 힘들어 어떤 때는 그냥 한 걸음만 절벽 쪽으로 내딛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답니다. 그러면 1,000m 이상을 미끄러지며 그대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오죽하면 절벽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싶었을까? 그 극한적인 상황을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합니다. 은선 씨가 오른 산 가운데 제일 힘들었던 산은 어떤 산일까요? 머리말에서 은선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높은 산을 다 올랐지만 정작 사람의 산을 넘지 못했다. (가운데 줄임) 사람의 산은 자연의 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험했다. 가늠하기 어려운 산, 화내는 산, 시기하는 산, 차별하는 산, 왜곡하는 산, 상처 주는 산, 상처받는 산, 사과하지 못하는 산, 용서하지 못하는 산, 사람의 산은 ‘갈등의 크레바스’ 투성이다. 아무리 올라가도 정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넘지 못한 사람의 산이 어디 타인뿐이랴. 나는 나라는 산도 넘지 못했다.

 

그렇군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뜻 산이 좋아 전문 산악인이 된 사람들은 거대한 산만큼 남을 포용하는 마음도 넓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군요. ‘사람의 산’이라고 하니까, 등정 여부가 논란이 되었던 칸첸중가(8,586m) 등정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김00 씨를 비롯한 남성 산악인들이 오은선 씨의 등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 은선 씨의 칸첸중가 등반은 ‘논란 중’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지요.

 

사람들 참 옹졸합니다. 우리나라 여성이 세계 처음 14좌 등정을 했다면 설사 미심쩍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더라도 축하해주고 오히려 감싸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외국 산악인들은 가만히 있는데, - 오히려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오은선 씨를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 왜 국내 산악인들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합니까? 은선 씨는 이런 남성 산악인들에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칸첸중가 등반 글 마지막을 “내부로 들어가 보면 산악계 중심에 서 있던 남성 산악인들과 갈등이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산악회는 애초 남성 중심으로 출발한 것이기에, 처음에는 군대문화가 산악회에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오은선 씨는 1991년 에베레스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때 출발을 앞두고 합숙 훈련 중 ‘빠따’를 맞고 목욕탕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슬슬 피하더랍니다. 빠따를 맞은 대원들 허벅지에 대걸레 자루로 맞은 시퍼런 피멍 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문화를 대변하는 말이 있지요. ‘선배는 하늘, 후배는 노예’-_-;; 은선 씨는 이때 직장생활과 도저히 병행할 수 없어 안정적인 서울시 공무원직을 던져버리고 에베레스트로 떠납니다.

 

은선 씨가 처음 오른 14좌는 1997년 7월 17일에 오른 가셔브룸Ⅱ (8,035m)입니다. 이후 브로드피크(8,047m), 마칼루(8,463m), K2(8,611m)에 가지만 정상에는 서지 못합니다. 그 뒤 은선 씨는 들러리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중심이 돼서 하는 등반을 꿈꿉니다. 그러면서 눈길을 7대륙 최고봉으로 돌립니다.

 

그리하여 2002년 8월 23일 먼저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5,642m)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매킨리, 아콩카과, 에베레스트를 차례차례 밟아나가 2004년 12월 19일 남극의 빈슨매시프(4,892m)를 오름으로써 국내 여성 처음으로 7대륙 최고봉 등정을 이루어냅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에는 정상 밑에서 설맹(雪盲)으로 얼어 죽은 박무택을 보고 통곡하면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후 은선 씨는 국내 여성 처음 7대륙 최고봉 등정이라는 명성을 얻고 다시 히말라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하나씩 8,000m 하늘의 벽 위에 발자국을 찍어나가, 2010년 4월 27일 안나푸르나(8,091m) 머리에 발자국을 찍음으로써 마침내 세계 여성 처음 14좌 완등이라는 대업을 달성합니다.

 

그 사이 K2를 오를 때에는 바로 옆에서 같이 오르던 셰르파 니마노루가 낙석을 피하다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 로체(8,516m) 등정 뒤 하산할 때는 환청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모르는 남자와 대화하며 내려왔다나요. 그리고 낭가파르바트(8,126m)를 등정하고 내려와서는 14좌 완등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고미영이 뒤이어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고 하산하다가 추락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은선 씨는 고미영과의 관계를 ‘언론이 만들어 놓은 라이벌 관계’라고 표현하더군요.

 

이렇게 오은선 씨는 여성 세계 처음 14좌 완등의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은선 씨는 이 기록보다는 ‘한 번에 두 봉우리씩 시즌별 연속 시도’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15달 만에 8개 봉우리를 무산소로 오른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더군요. 이는 남녀 통틀어 오은선 씨가 유일한데,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도 ‘엄지척’을 해주어, 은선 씨는 더욱 큰 자부심을 품는답니다.

 

15달 만에 8개 봉우리를 무산소로 오른다... 이 정도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철녀(鐵女)겠지요? 사실 제가 2011년에 불암산 산행을 위해 오은선 씨를 만날 때에도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만났었습니다. 그런데 오은선 씨와 악수하는 순간, 부드러운 손의 촉감이 보통 여자들과 다르지 않던 것이 지금까지도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책을 보다 보면 옆에서 숨소리를 느낄 수 있듯이 생생한 등정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래전 등정기록을 그렇게 실감 나게 펼칠 수 있을까? 그건 오은선 씨가 일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곳곳에 은선 씨의 일기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에베레스트 오르면서 박무택의 시신을 본 순간에 대해 쓴 일기를 인용해볼까요?

 

첫눈에 ‘무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진정하고 일단 [...] 무전으로 확인부터 했다. 의상과 신발, 장갑 등 브랜드와 색상을 물어보았는데 무택이가 맞다. “아! 이렇게 높은 데 있으면 어떻게 해!”하는 원망이 순간 마음속에 꽉 차오르고 “이렇게 높이 있으면 구조를 어떻게 해!”하며 울고 또 울다 정신을 가다듬는다. 나까지 죽을 수는 없다. [...]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산소도 다 떨어져 가는데... 혼자는 죽어도 못 내려가겠고... (2004년 5월 22일 일기. 21일 내려와 22일 정리함)

 

박무택의 주검을 본 순간의 감정을 진솔하게 적었네요. 사실 은선 씨는 박무택의 주검을 보고도 그냥 정상에 올랐다고 나중에 박영석 대장으로부터 비난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은선 씨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그저 하늘나라에 잘 가라는 기도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엄홍길 대장도 휴먼원정대를 조직하여 에베레스트에 올라 박무택 주검을 운구하여 내려오려고 하였지만, 얼마쯤 내려오다 도저히 더 이상 운구할 수 없어 그곳에 돌무덤을 만들어 주검을 안치하고 내려와야만 했었지요.

 

책의 마지막에 오은선 씨는 15좌를 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14좌 등정에 성공한 뒤 은선 씨는 학문이라는 거대한 산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20년 2월 체육학 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15좌까지도 넘은 것입니다. 15좌까지 오른 오은선! 이제 오은선의 한 걸음은 또 어디로 향할 것인가? 문무를 겸비한 여인, 오은선! 정말 대단한 여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