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3 (일)

  • 구름많음동두천 21.1℃
  • 흐림강릉 21.9℃
  • 흐림서울 22.4℃
  • 흐림대전 21.9℃
  • 흐림대구 23.0℃
  • 흐림울산 21.4℃
  • 흐림광주 22.0℃
  • 흐림부산 23.7℃
  • 흐림고창 22.1℃
  • 흐림제주 24.3℃
  • 흐림강화 20.8℃
  • 흐림보은 20.6℃
  • 흐림금산 22.4℃
  • 흐림강진군 22.8℃
  • 구름많음경주시 23.2℃
  • 구름많음거제 22.6℃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술버릇에 관한 뒷이야기의 윤회와 정흠지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⑪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윤회와 정흠지를 살펴보자.

 

 

윤회(尹淮, 우왕 12, 1386 ~ 세종 18. 1436)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문신이다. 윤회(尹淮)는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한관(文翰官, 문필에 관한 일을 하는 직책)으로서 국가의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많은 글을 지었으며, 경연에서 여러 차례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활동사항

 

윤회는 나이 10살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외울 정도로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태종 1년(1401) :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좌정언, 이조좌랑ㆍ병조좌랑, 이조정랑ㆍ예조정랑과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변정도감(辨正都監)이 되어 송사를 판결함이 공명하고 진실하였다.

 

태종 17년(1417) : 승정원의 대언(代言)이 되었다. 태종이 일찍이 윤회에게 이르기를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와 견줄 바가 아니니 힘쓰라” 하였다. 임금은 곧 윤회를 병조참의로 삼아 가까이 두고 늘 ‘순정(純正)한 학자’라 일컬었다.

 

세종 4년(1422) : 집현전이 설치되자 부제학으로 임명되고 다시 예문제학(藝文提學),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술을 즐겨, 태종과 세종이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 마시기를 도에 넘치게 하는 것이 결점이다. 이제부터 양전(兩殿)에서 하사하는 술 말고는 과음하지 말라”며 여러 차례 타일렀으나 그치지 못하였다.

 

윤회와 남수문은 같이 술을 잘 마셔 과음할 때가 많았다. 이들의 재질을 아낀 세종이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게 한 후로는 연회 때마다 둘이 큰 놋쇠 그릇으로 석 잔씩 마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문성ㆍ주성의 정기가 합하여 윤회 같은 현인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세종 6년 : 태종의 막내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지명을 지었으며, 아버지 윤소종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펴낸 《고려사》를 다시 개정하여 완성하였다.

 

세종 13년(1431) : 풍질(風疾)을 앓기 시작했는데 병세가 점점 심해졌으나 병을 참고 서적 간행과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2년 뒤 병이 심해졌다. 세종이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또 내수소(內需所)의 좋은 약을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다.

 

세종 14년 :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펴냈다.

 

세종 16년 : 삼강 행실의 교서를 지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바탕으로 이듬해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펴냈다. 저서로 《청경집(淸卿集)》이 있다. 작품은 〈봉황음(鳳凰吟)〉 등이 현전한다.

 

세종 18년 병석에 누웠고 그해 3월 12일에 죽었다. 그의 나이 향년 56살이였다.

 

윤회의 뒷이야기

 

윤회는 술을 좋아했다. 세종 12년 어느 날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빈객(賓客) 윤회(尹淮)가 서연(書筵)에 나아가서 강의를 맡아야 하는데 술에 취하여 참석하지 아니하였으니, 도무지 공경하며 삼가하는 뜻이 없습니다. 청하건대,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회에게 이르기를, "경이 술을 마시어 도를 지나치는 일이 한 차례가 아니었고, 내가 경에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이 임금의 명령에 대하여는 물이나 불 속을 들어가라 하여도 오히려 피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자기의 주량(酒量)을 생각하여 한두 잔쯤 마시든지, 반 잔쯤만 마신다면 그렇게 정신이 없고 체면을 잃게까지야 되겠는가. 이제부터는 부디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하고, 들어와서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윤회가 술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의 재주를 아껴서 과음하지 말라고 경계한 적이 있었는데, ... 조금도 고치는 빛이 없었고, 지금 또 취해서 서연(書筵)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세자(世子)를 도와서 바르게 이끄는 도리에 있어 어떻겠는가. ... 도리를 알 만한 선비도 이러하니 무식한 소인의 무리야 말할 것도 없다." 하였다.(《세종실록》12/12/22)

 

이런 데 근거하여 그의 덕과 술버릇에 관한 뒷이야기가 따른다.

 

· 뒷이야기 하나 : 그가 어느 시골길을 가던 도중 한 주막에 들렀는데, 방이 다 찼다고 하여 별수 없이 마당에서 밤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주막 주인의 아들이 진주를 가지고 오다가 마당에 떨어뜨렸고, 잠시 뒤 거위가 대뜸 그걸 삼켜버렸다. 진주를 잃어버린 아들은 대성통곡을 하였고, 주인은 아무리 찾아도 진주가 보이지 않자 이내 윤회를 의심해 불같이 화를 내며 꽁꽁 묶어놓고 다음 날 관가에 고발하겠다 했는데, 윤회는 순순히 묶이면서 저 거위를 자기 옆에 같이 매어놓아 달라는 좀 생뚱맞은 부탁을 했고, 주인은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관가로 가자고 하자 윤회는 먼저 거위의 똥부터 살펴보라고 하였고, 놀랍게도 그 거위가 싼 똥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윤회를 풀어주며 사과하면서 왜 진작 저 거위가 삼켰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묻자, 윤회는 그렇게 말했으면 거위의 배를 갈라서 진주를 찾으려 하지 않았겠냐며 ​그러면 진주는 금방 찾았겠지만, 거위는 죽었을 거라면서 거위를 죽이지 않기 위해 치욕을 견뎠다고 답했다. 물론 사실일 가능성은 작다.

 

조선 초기에 일개 주막 주인이 사대부의 아들을 묶어놓는 간 큰 짓을 저지를 수 있을 리가 있었겠는가.

 

· 뒷이야기 둘 : 윤회가 하도 술을 좋아하자 건강을 걱정한 세종대왕이 "앞으론 하루에 딱 석 잔 만 마시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얼마 후 윤회가 취해서 집현전 경연에 불참하는 일이 생기자 화가 난 세종이 윤회를 불러 어찌 된 일인지 캐물었는데, ​어명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술을 잔뜩 마시기 위해 앞서 보았듯 윤회는 평범한 술잔 대신 놋자배기에 술을 담아 마셨다. (참고 : 나무위키)

 

 

정흠지鄭欽之 (우왕 4년, 1378년 ~ 세종 21년 1439)

 

세종시대 심지 곧은 선비 정흠지를 그의 졸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중추원사 정흠지(鄭欽之)가 졸(卒)하였다. 흠지의 본은 경상도 동래(東萊)인데, 법을 잡고 아첨하지 아니하여, 좌정승 하윤(河崙)을 탄핵하다가 드디어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태종 신묘년(1411)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ㆍ병조 정랑ㆍ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을 거쳐서, 병신년(1416)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세종이 일찍이 철원군(鐵原郡)에서 강무(講武)할 때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흠지는 홀로 아뢰기를, "이제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을 주면 뒤에 전공(戰功)이 있는 자에게는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려고 하시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겨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충청ㆍ경상ㆍ전라 세 도의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바닷가 고을의 성터를 살펴서 정하였다. 을묘년(세종 17년, 1435)에 나라에서 함길도에 회령 등 진(鎭)을 새로 설치하여 군무(軍務)와 민사(民事)의 일을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우므로, 세종께서 "정흠지를 관찰사로 삼고, 김종서를 도절제사로 삼았으니, 내가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어서 흠지에게 명하여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고, 이듬해에도 와서 어머니를 뵈옵게 하였으며, 특별히 술ㆍ고기ㆍ풍악 등을 내려서 어머니를 축수하게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임지로 돌려보냈었다. 이내, 어머니의 병이 급해서 소환(召還)하여 중추원사에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어머니 상(喪)을 만나고 병이 들자, 죽음에 미쳐 나이가 62살이다.

 

일을 처리할 적에는 대체에 따르기를 힘쓰고 남다른 이론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임종할 때 유서(遺書)로 여러 아들에게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기를 가르쳤다. (《세종실록》2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