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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단종이 죽은 뒤 정순왕후는 어떻게 살았을까?

정순왕후의 흔적이 서린 푸성귀시장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3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조선의 임금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제일 애잔하게 하는 임금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사람은 단종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쫓겨 간 단종. 그것도 모자라 17살의 나이에 결국 죽임을 당한 단종. 단종을 생각하며 마음이 애잔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임금이기에 단종을 신으로 모시는 무속인들도 많지 않은가?

 

단종이 이렇게 채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갔다면, 그의 아내 정순왕후 송 씨는 어땠을까? 단종보다 한 살 더 많았던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고도 64년을 더 살다가 1521년(중종 16)에 세상을 떴다. 단종과 불과 3년도 안 되는 기간 부부로서 정을 맺었다가, 그 후 오랜 기간 한 많은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정순왕후. 그럼, 정순왕후는 그 오랜 세월을 어디서 어떻게 삶을 이어갔을까? 동대문구 창신동, 숭인동 일대에는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지금부터 창신동, 숭인동으로 정순왕후 삶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자.

 

먼저 가보는 곳은 청계천 영도교다. 이곳에서 정순왕후는 영월로 피눈물을 흘리며 길을 떠나는 단종과 마지막 이별을 하였다. 단종이 이곳을 건너가 영원히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한다. 일설에는 단종 부부가 근처 청룡사 우화루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하는데, 귀양길에 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사실 확인도 되지 않는다.

 

지금의 영도교는 오늘날 복개되었던 청계천을 다시 살려내면서 새로 설치한 다리다. 영도교 위에는 그 옆 풍물시장에서부터 뻗쳐 온 노점상들로 인하여 늘 북적이는데, 과연 북적이며 영도교를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560여 년 전 이곳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져야만 했던 단종 부부의 슬픈 사연을 생각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

 

그럼, 영도교에서 단종과 영영 이별한 정순왕후는 그 뒤 어디에서 살았을까? 처음 궁에서 쫓겨난 정순왕후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친정아버지 송현수도 처형되면서 노비로 강등되었다. 정순왕후가 노비가 되자, 자기 집 종으로 달라고 하는 파렴치한 양반도 있었다고 하는데, 세조는 차마 그 청까지는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정순왕후는 불교에 귀의하여 창신역 3번 출구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자기를 따르던 궁녀 몇 명과 평생을 같이 살았다.

 

원래 이곳에는 고려 시대부터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아마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억불정책에 터만 있었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했을 것이다. 불교에 귀의한 정순왕후는 이곳 한 귀퉁이에 초막을 짓고 산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자리에는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비각(碑閣)이 있다. 정업원은 비구니 절인데, 출궁(出宮)한 궁녀들이 이곳에서 비구니가 되었기에 업을 정화한다고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정업원은 원래 창덕궁 근처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정업원의 비구니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하여 비구니들이 정순왕후 곁으로 와서 정업원을 다시 세웠는데, 순조 때 지금의 청룡사가 되었다. 비각의 비문은 영조가 정순왕후의 사연을 알고 애타는 마음에 직접 쓴 것이라 한다.

 

그럼, 거처는 이렇게 마련하였다고 하여도 생활은 또 어떻게 하였을까? 세조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결심한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궁녀들과 같이 옷감을 자주색으로 물을 들여 파는 일로 입에 풀칠하였다고 한다. 혜화동 낙산에 가면 청백리 유관이 살던 비우당을 복원해놓았는데, 그 뒤쪽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말랐지만, 정순왕후는 이곳 샘물에서 지초(芝草)로 옷감에 물을 들여 호구지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근처 마을의 백성들은 한 나라의 왕비였던 송씨가 이렇게 옷감을 염색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리하여 아낙네들은 정순왕후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곤 하였는데, 야사에는 세조가 이를 금지했다고 한다. 그러자 여인들은 새벽에 여인들만의 시장을 열어 몰래 정순왕후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풍물시장에 가면 ‘여인시장 터’라는 표석이 있는데, 그 주위를 노점상들이 점령하고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표석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좌판에 진열해놓은 다양한 벼룩시장 물품에나 눈길을 주지, 표석에까지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정순왕후는 이렇게 삶을 이어가지만, 가슴에 맺힌 그 한은 어찌 풀 수 있으랴? 정순왕후가 살던 집 바로 남쪽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다. 지금은 이곳을 숭인근린공원으로 부르는데, 이곳에 오르면 표석 하나를 또 발견할 수 있다. ‘동망봉’이라는 표석이다. 옆에는 동망정이라는 정자도 세워놓았다. 정순왕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곳 봉우리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정순왕후는 이곳에 올라와 처음에는 단종이 그저 목숨만은 붙어있길 바라며 기도했을 거다. 그렇지만 그런 기도도 헛되이 단종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기도는 통곡으로 변했을 것이고, 이후 정순왕후는 단종이 내세에는 이 더러운 세태를 잊어버리고 평안히 거하기를 기도했을 거다.

 

지존(至尊)에서 노비로 전락하고 지아비마저 잃어버린 여인 정순왕후. 정순왕후가 통곡할 때, 마을의 아낙네들도 같이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왜 안 그랬겠는가? 영조는 이런 얘기도 듣고 ‘東望峰’이라는 글씨도 내려보내, 이를 동망봉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동망봉 바위가 채석장의 바위로 깨져나가면서, 영조의 글씨도 사라졌다.

 

64년의 긴긴 세월을 살아가던 정순왕후는 죽어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묻혔다. 죽을 땐 노비의 신분으로 묻혔겠지만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의 무덤도 왕릉으로 승격되었으니 이게 사릉(思陵)이다. 정순왕후의 복잡한 심사를 생각하고 사릉이라고 했을까? 그럴 리는 없고, 정순왕후가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였다고 숙종이 사릉이라는 능호를 내린 것이라고 한다.

 

단종은 영월 장릉에 묻혀있으니, 죽어서도 이들은 합치지 못하고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다. 그 대신 1999. 4. 9. 남양주문화원에서 사릉 앞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장릉 앞에 옮겨 심었으니, 바로 정령송(精靈松)이다. 비록 유체(遺體)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혼만이라도 합치라는 의미로 정령송을 옮겨 심은 것이다.

 

요즘 둘레길이니 역사문화길이니 하여 전국 곳곳에 다양한 길이 만들어졌다. 이곳 창신동, 숭인동 일대에 퍼져 있는 정순왕후 삶의 흔적을 이어 ‘정순왕후 눈물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나도 오랜만에 다시금 정순왕후를 만나러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