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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파리의 외로운 학(鶴) 한 마리

프랑스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음악의 매력 보여주길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6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저는 학입니다. 저는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습니다. 보통은 하얀 색이지만 지금 저의 몸에서는 황금빛 광채가 은은히 퍼지고 있는데 혹 보이시나요? 저는 가끔 두 다리를 곧게 펴고 날아오르기도 합니다. 제가 있는 곳이 박물관 전시장의 진열창 속이고 제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오동나무 판이어서 이따금 날개를 펴고 솟아올라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재미가 좀 없습니다. 누가 봐주면 좋겠는데 여기 프랑스 사람들은 제가 여기 있는지를 모르는 지 거의 오지 않고요, 저의 존재를 알 만한 한국 사람들도 별로 오지 않으니까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지 120년이 넘었습니다. 제 나이요? 학은 천 년을 살 수 있는 것 아시지요? 제가 처음 한국 땅에 내려온 것이 고구려 24대 양원왕陽原王(재위 545∼559) 때인데 그때는 막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까 그때부터 치면 1,500살이 조금 안 됩니다. 당시 왕산악 선생이 중국에서 온 7줄의 칠현금이란 악기 대신에, 밤나무로 밑판을 대고 그 위에 오동나무로 울림통 덮개를 덮은 6줄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기에 그것을 축하한다고 높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때 사람들은 검푸른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축하한 악기라는 뜻에서 새 악기를 ‘검은 고’, ‘거문고’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당시는 우리말로 표기하기 어려워 한자로 뜻을 빌려 현학금(玄鶴琴)이라고 썼는데 뒷사람들은 그 글자만으로 제가 검은 학이었다고 하지만, 천자문의 첫머리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하늘(天)은 검다(玄)”라고 하는데, 이때의 ‘검다’는 것은 ‘꺼멓다’라는 뜻이 아니라 끝도 없이 크고 넓고 깊어서 검게 보이는 푸른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푸른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축하한 악기’라는 뜻으로 풀어야 하지요. 아무튼 그때 이후 거문고는 우리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저는 거문고 음악이 연주될 때면 즐겨 찾아와 옆에서 춤을 추곤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학들은 거문고와 함께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천오백 년을 넘게 한국 땅에 살아왔지요.

그런데 왜 파리에 와 있느냐고요?

 

 

정확히 124년 전에, 당시 고종황제가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처하자, 대한제국이 엄연히 지구상의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려서 침략 야욕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고 이곳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의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음악 악기들을 보내자고 했고 거기에 모든 악기의 어른이란 뜻의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가 당연히 뽑혔지요.

 

그래서 저는 고구려 왕산악이 이 악기를 처음 만들 때 하늘에서 날아와 축하해 준 그대로 대한제국의 위엄을 알리기 위해 북한산의 큰 소나무에서부터 내려와 이 악기의 안족과 괘 사이 오동나무 판에 살짝 앉았는데 그때가 아침이어서 찬란한 아침 해를 받아 저의 몸이 황금색으로 보였고요. 당시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찬(閔泳瓚) 법부협판(法部協辦)이 파리로 가는 사절단의 단장이 되어 제가 앉아있는 거문고를 다른 악기들과 함께 머나먼 파리로 데려오게 되었지요. 내 거문고는 오자마자 에펠탑 옆에 마련된 만국 박람회장의 한국관 한 가운데에 가장 잘 보이게 진열해 놓아서 나도 거기서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관은 프랑스 건축가 외젠 페레(Eugène Ferret·1851~1936)가 서울의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설계하고 프랑스 귀족들이 돈을 대어 세웠는데 건물 자체도 당시의 동아시아관(館) 중에서 눈에 띄게 멋이 있었고 그 안에 거문고를 비롯해 우리 악기와 단원 김홍도의 그림, 요즈음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백자대호 등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품들이 진열돼 있으면서 관람객들을 맞았습니다.

 

저도 거문고 위를 날아다니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얼마나 많이 왔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였고요, 사람들은 거문고라는 악기와 그 위를 날며 인사를 하는 저를 무척 좋아했는지 당시 《르 쁘띠 쥬르날(Le Petit Journal)》 잡지 1면에 한국관 삽화가 실리고 당시 박람회 홍보엽서에도 담겼으며 아름다운 전시관으로 동메달을 받는 영광을 얻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가 폐막하였는데 우리 대표단은 거문고 등 전시품들을 다시 갖고 갈 여비가 부족해지자, 프랑스에 기증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문고와 함께 파리에 남게 된 것이지요. 전시품 가운데 공예품은 프랑스공예예술박물관으로, 악기는 프랑스국립음악원의 악기박물관으로 이관됐습니다. 이들 악기는 그동안 파리의 여러 박물관의 수장고(收藏庫)를 거치며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4년에 음악박물관에서 비(非)유럽권 악기 전시를 담당하는 학예연구원 필리프 브뤼귀에르 씨의 노력으로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소식은 한국에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브뤼귀에르 씨는 수소문 끝에 파리 인류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한국 악기를 찾아내 음악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파리에 와 보시면 알겠지만, 음악박물관은 파리 북동부인 피리19구 라 빌레트(La Villette)에 자리 잡고 있고요, 여기에는 극장, 콘서트장, 음악원, 박물관 등이 모여 있어서 음악도시라고 합니다. 음악박물관은 1995년 개관했습니다. 드디어는 이 음악박물관이 새로 단장돼 문을 열면서 거문고와 우리 악기 11점이 5층의 동양과 아시아 아프리카 악기 코너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지요

 

제가 앉아있어서 저의 집이라 할 거문고는 길이 145센티, 폭 20센티, 높이 12센티로 다른 거문고보다 더 길고 웅장한데 현을 받치는 괘 일부가 파손되어 복원작업을 했고요, 보시다시피 저는 두 다리를 모으고 황금색의 날개를 펴서 날아오르는 형상이어서 사람들은 제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제가 외롭다고 하는 것은, 이번에 모처럼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려 선수들뿐 아니라 응원을 위한 국민이 파리에 왔는데 그분들이 저를 보러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센강 강가에서 많은 한국분들이 금메달 은메달을 많이 땄다고 환호하고 그러던데, 그런 환호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는 했지만 정작 우리 국민을 여기에서 거의 보지 못하니 제가 외로움을 느낄만하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면 저도 파리에 올림픽 대표 선수로 온 것이지요. 그때는 문화올림픽이었고요. 저도 우리 팀이 동메달을 따는데 이바지했으니 말하자면 첫 동메달 수상자로 기록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시 어린 자식 멀리 떠나보내는 애틋한 심정으로 파리로 보낼 전시품들을 일일이 챙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마음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받은 첫 동메달이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터인데 사람들은 잘 모르지요. 그러기에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받으며 센강 강가에 환호성이 일 때마다 저는 이 진열장 안에서 외로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당시 제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는 지금 거문고 위에 앉아있는 저의 얼굴의 똥글똥글한 눈동자를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100년이 넘게 이국땅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지난 2012년에 국립국악원의 국악박물관 재개관을 기념해서 일시 귀국했고, 8월 7일부터 석 달 동안 서초동에서 우리 국민들을 다시 만났는데 전시가 끝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다시 12년 동안 지금껏 이러고 있답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번에 온 선수단이나 응원단이 올림픽이 끝나고 다 같이 저의 전시장으로 와서 인사를 나누었으면 제가 얼마나 기쁘고 보람이 있었을까요? 다들 메달을 걸고 기쁘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이곳은 더 쓸쓸하고 서글픕니다. 저도 국가대표로 나온 것이고 그동안 백년 넘게 외로운 파리에서 말없이 지내온 것인데 다 같이 와서 수고하고 있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면 그동안의 외로움과 속상함이 다소 가시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더라도 제가 처음 파리에 온 124년 전과 비교하면 우리 한국의 위상이 너무도 높이 올라가 있어, 여기 구석에 있어도 저는 사실 뿌듯합니다.

 

아참. 올림픽 기간에 국악을 연구하고 진흥하는 일을 하는 주재근 님이 일부러 저를 보고 가셨더라고요. 그리고 저의 존재를 알려주셔서 몇몇 분들이 다시 관심을 갖게 되기는 했습니다. 저는 기왕에 주재근 님이 오셨으니 국악 당국에 말씀을 잘 드려서 이곳에 나온 지 125년이 되는 내년쯤에는 이곳 음악박물관에서 거문고 음악을 멋지게 연주해서 아, 한국의 거문고가 정말 멋진 악기이고, 그래서 저 학이 이곳에 날아와 100년이 넘게있구나 하고 알아줄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 거문고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 전통음악 악기가 나와 한바탕 멋진 판을 벌이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파리는 한국문화에 넘어갔고 K-POP의 율동이 진동하는데, 거기에 우리의 전통음악이 또 얼마나 멋있는지를 프랑스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저로서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 이곳 음악박물관 거문고 위에서 살아갈 자신이 있습니다.

 

한국의 국민에게 이런 저의 간절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