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나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는 굳은 의지로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권기옥(權基玉,1901.1.11~1988.4.19) 애국지사는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당찬 여장부다.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平安南道 平壤府 上水口里) 152번지에서 아버지 권돈각(權敦珏)과 어머니 장문명(張文明)의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은 기옥이 아니라 갈례라고 불렀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아버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서 가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집안이 어려워 11살 되던 해 은단공장에 다니면서 집안 살림을 돕던 권기옥은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 교회(章臺峴敎會, 1894)에서 운영하던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숭현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기독교 계통 학교인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졸업반이던 그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가담하게 되는데 숭의여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박현숙 선생의 영향을 받아 항일 비밀결사인 송죽회에 참가해 활동했다. 그는 스승 박현숙을 통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신홍식으로부터 지휘를 받아 1919년 3월 1일 경성부의 만세 시위와 동시에 평양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는 데 동참했다가 잠시 구금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참가했는데, 평양 지역 청년 조직인 평양청년회의 김재덕과 연결된 것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임득삼, 김정직, 김순일 등을 통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1920년 봄 감옥에서 출소한 권기옥은 브라스밴드단을 만들어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연락활동을 한다.
여름에는 평남도경 폭파를 위해 잠입한 임시정부 산하 청년단원 문일민, 장덕진을 숭현보통학교 석탄창고에 숨겨주고, 당일 현장까지 폭탄을 운반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권기옥이 의 이러한 행동은 일제감시망에 걸려 체포 직전 간신히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고 조만식 선생이 몰래 보내준 여비로 중국행 멸치잡이 배를 얻어 타고 상해로 탈출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 의장집에 머물면서 남경에서 80여명의 한국인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규식 애국지사의 부인인 김순애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들고 남경으로 달려갔다. 남경에 도착한 그는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항주(抗洲)의 홍도(弘道)여자중학교를 찾아갔으나 중국어가 시원치 않아 필담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혀 3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했으나 서투른 중국어 실력으로 떨어져 1학년으로 재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1학년 수업도 따라가기 어렵게 되자 그는 아예 소학교 1학년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기로 맘을 먹고 차근차근 중국어 공부를 익혀나가 단숨에 월반하여 졸업할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쥐었다.
▲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 애국지사 (왼쪽에서 두 번째)
졸업 후 곧바로 중국의 비행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비행학교를 지원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가 지닌 독립에 대한 크나큰 열정과 주변의 권유가 있었다. 비행술을 배우면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권기옥은 비행학교에 입학하려고 애썼으며, 당시 임시정부로서는 비행기 확보와 아울러 비행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둘째로 일본의 비행학교와는 달리 학비가 매우 쌌던 점도 작용을 했다. 혈혈단신 이국땅에서 값비싼 학비를 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력 인사의 추천장을 받아 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군벌들이 세운 4개의 비행학교가 있었다. 이 가운데 보정항공학교와 남원항공학교에서는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손문이 설립한 광동항공학교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남은 것은 중국 서남단의 외진 곳에 자리한 운남성의 운남항공학교뿐이었다.
서류로는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권기옥은 임시정부 이시영 선생의 추천서를 품고 여자의 몸으로 위험천만한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한 달 만에 운남성 곤명에 도착했다. 1923년 12월 그는 추천서를 들고 교장인 당계요와 직접 담판을 짓게 되는데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교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처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의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 말고도 권기옥이 항공학교를 지원 하게 된 계기는 16살 때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요즘 말로 하면 에어쇼로 권기옥이 16살 되던 해인 1917년 5월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의 곡예 비행사인 스미스(A. Smith)의 곡예비행이 있었는데 그만 그 자리에서 비행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당시 스미스의 곡예비행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과학에 대하여 눈뜨게 하였고, 청소년들에게는 창공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갖게 하였다. 이때 “일본으로 폭탄을 몰고 가 천황이 사는의 황거를 폭파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항일투쟁에는 무조건이었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날며 왜놈들을 쉽게 쳐부술 수 있는 비행사가 되려고 마음을 다졌지요.” 권기옥은 환갑 나이이던 1961년 ‘여원’ 잡지 7월호에서 그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권기옥” 애국지사 이야기는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