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라 "이신애"
이윤옥
천마산 산마루에 높이 뜬달
만월대에 아름답게 비추고
선죽교 임 향한 일편단심 드높은 곳
개성 호수돈여학교
아리따운 소녀
빼앗긴 나라의 운명에 목숨 걸었다
사이토마코토 처단하자는
피맺힌 강우규 동지의 절규 도와
죽음도 불사하고
뛰는 심장 멈출 때까지
목 놓아 불렀을 광복의 노래
그 노래 그쳤으나
가신 곳 가신 날 모르는 님의 소식
안타까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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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애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
이신애(李信愛, 1891.1.20 ~ 미상)
3·1독립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19년 9월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기동과 함께 강우규를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초순에는 한기동의 권유에 의해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이 단체가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신애 애국지사는 1919년 10월 6일 '총독에 관한 흉행범인 체포의 건'을 시작으로 부터 1926년 6월 16일 일본외무성 문서의 '간도 및 훈춘지방 조선인 결사단체 건'에 이르기까지 무려 25건에 이르는 심문과 조서를 당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11월 29일 경무총감부 조서에 나타난 이신애 애국지사 조서 한토말을 보면 이신애 애국지사의 단호함이 엿보인다.
문: 그대가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독립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만세를 부르면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커다란 시위운동으로 번져 독립이 될 것으로 믿었다.
*이신애 애국지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린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에 나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