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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홍일점 여장부 “방순희”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장강에 도도히 흐르는 물결 거스름 없이
기강 토교 중경 발길 닿아 머무르는 곳
따스한 봄바람 되어 이웃을 감싸주던 님

조국을 되찾는 일에
쟁쟁한 독립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단상에 서서 독립을 염원하던 그 자태
그 씩씩함
겨레의 든든한
맏누님 되신 이여!

어루만진 동포의 쓰라린 가슴이 몇몇이며
따뜻하게 감싸주던 고독한 독립투사
또 몇몇이랴

사나이 태어나 이루지 못할 대업
여장부 몸으로 당당히 살아낸 세월
그 늠름하고 당찬 모습
조국이여
오래도록 잊지 마소서.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회장 방순희 애국지사 (1940.6.17), 앞줄 가운데 (○)한 이 (사진제공 오희옥 여사)

 
방순희(方順熙, 方順伊, 1904.1.30-1979.5.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라면 오늘날의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나라 잃은 임시정부 하에서의 의정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0년 9월 중경 이전 당시 임시의정원의 전열을 가다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래 표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임 시 의 정 원

의장

김붕준

부의장

최동오

의원

이시영·김구·조성환·조소앙·조완구·차이석·송병조·엄항섭·양묵·신공제·

문일민·민병길·홍진·이청천·조경한·신환·방순희·공진원·박찬익·김학규·

조시원·이흥관·나태섭(일명 왕중량)·이웅·황학수·이상만·이복원·유동열

이 가운데 특히 김구를 포함한 국무위원 10인(이시영·조성환·유동열·송병조·홍진·조완구·차이석·조소앙·이청천)이 전부 의정원 의원을 겸하였다는 것은 임시정부의 인물난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의정원법에 의한 의정원 의원 수는 경기·충청·황해·평안·함경·경상·전라·강원 8도의 42명과 중령(中領)·아령(俄領)·미령(美領)의 15명, 합 57명이었는데 위 표에서 보듯 재적 의원 수가 30명에 지나지 못했으니 의원 구성원들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그러한 인물난 가운데 방순희 애국지사는 당당히 여성의원으로 꺼져가는 임시정부의 불꽃 역할을 다했으니 어찌 장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랴. 

방순희 애국지사는 국운이 기울어 가던 190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일찍이 경성으로 상경하여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하였다. 정신여학교는 당시에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주권의식과 애국사상을 가르쳤는데 북장로교에서 운영하던 학교로 교사와 학생 모두 열렬한 애국투사들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면서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애국부인회를 조직했으며 대한적십자 경성지부를 조직하여 왜경의 감시를 받을 만큼 활약이 두드러졌다.  

열여섯 살 되던 1919년 3·1독립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의 삼엄한 감시 탓에 상해로 망명했는데 때마침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서 이를 뒷받침할 여성 단체가 필요하였다. 재정형편이 열악한 임시정부를 돕는 일은 남녀를 불문하는 일이었지만 특히 여성들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을 조직하여 회비 징수와 군자금 모집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이들은 독립전쟁요원들을 지원하고 국민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방 애국지사는 당시 보성중학 졸업반일 때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왜경에 고문을 당하다 1921년 상해로 망명한 우당 김관오 애국지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김관오 애국지사 역시 투철한 독립투사 동지로서 함께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눠 독립의지를 불태운 방 애국지사의 주요공적을 보면 1938년 8월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 1942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경구당부 간사, 1942년 10월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 1943년 6월에는 한국임시정부 선전부장, 194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 연락원으로 뽑혀 선발대로 귀국하게 될 때까지 굵직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조국광복의 초석 역할을 톡톡히 한 여장부의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