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빗창으로 다구찌 도지사 혼쭐낸 제주 해녀 “부춘화”
이윤옥
▲ 부춘화 시화 (그림 이무성 화백)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가슴 저 밑바닥 속
한 줌 한을 꺼내 말리던
불턱에 겨울바람이 일고 있오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
무자맥질 숨비소리 내뱉으며
거친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린 처녀의 꿈
짓밟고 착취하며
검은 마수의 손 뻗치려던 도지사 다구찌 놈
보란 듯이 빗창으로 혼쭐내던
세화리 장터의 억척 여인이여!
그대의 분노로
저들의 야수는 꺾이었고
그대의 피흘림으로
조국 광복은 한발 앞서 이뤄졌나니
평화의 섬 제주를 찾는 이들이여!
세화민속오일장 한 접시 회 마주하고
부디 말해주소
해녀 부춘화의 간담 서늘한 애국 이야기를!
*불턱: 해녀들이 물 밖으로 나와서 모닥불을 지피고 젖은 옷을 말리는 곳
*숨비소리: 해녀들이 작업하다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호오이’하며 길게 내쉬는 숨소리
*빗창: 전복채취 때 쓰는 쇠갈고리(아래 사진)
부춘화(夫春花, 1908.4.6-1995. 2.24)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항일운동 가운데 여성운동과 어민투쟁의 측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해녀 항일운동사건의 주동자인 부춘화 여사는 1908년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나 15살 때부터 물질을 배웠다. 낮에는 힘든 물질을 하면서도 밤이면 하도 사립보통학교의 야학부에 들어가 세화리 출신 부대현 선생과 하도 출신 김순종, 오문규 선생으로부터 민족의식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는 동안 민족 자주정신을 싹 틔웠는데 1931년 5월 일제에 의한 해녀 착취가 극에 달하자 이를 저지 하고자 해녀들을 단결시켜 일제와 투쟁을 결행하였다.
연약한 여성으로서 특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해녀로서 악독한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항일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저변에 민족 자주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고 있던 비밀결사조직인 혁우동맹(문도배, 한원택 선생) 젊은 청년들의 힘이 컸다.
일제는 해녀항일운동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려고 목포 응원경찰대까지 동원하여 1932년 1월 26일 사건 연루자 100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고자 해녀대표인 부춘화 여사는 해녀 1,500여 명을 동원하여 검속 경관대를 습격하여 무장경관대에 격렬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때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부춘화 여사는 모든 것을 자신이 단독으로 주도하였다고 자수하여 전라남도 경찰부 순사들이 철수하는 경비선으로 목포 유치장에 압송되어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1932년 7월 미결수로 석방되었다.
석방 뒤에도 계속되는 왜경의 감시와 미행으로 1933년 1월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촌 언니 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7여 년간 가내공업을 하면서 지내다가 구좌면 세화리 출신 고한일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고 오사카에서 살았다.
광복 뒤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고향 세화리에서 부인회장을 하면서 해녀들의 권익 옹호에 힘썼으며 이후 부산, 서울 등지로 거처를 옮겨 살다가 1995년 3월 24일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춘화 애국지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2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