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8 (수)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항일독립운동

열여섯 여자 광복군 용인의 딸 “오희영”

[여성독립운동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열여섯 여자 광복군 용인의 딸 “오희영” 

                                                                   이윤옥

     화탄계 냇물에 비친 하늘
      먹구름 걷히어 맑고 맑구나
      물 건너 신한촌 옹기종기 모인 동포들
      콩 한쪽도 나누며 나라 사랑으로 살아갔지
      이역만리 고향땅 기약 없이 떠나온 
      의병장 명포수 할아버지 뒤를 이어
      아버지 어머니 남편 여동생까지
      독립의 끈으로 묶인 나날들
      유주 부양 중경으로 터 바꾸며
      열여섯 소녀 광복군 되어
      굴곡과 고난의 가시밭길 걸어간 자리
      해마다 잊지 않고 피어나는
      챠우쉔화 꽃향기 속에
      살아나던 독립의지
      하늘에 닿았으리.

    *화탄계: 임시정부요인들의 가족이 살았던 중국 중경 근처 토교의 신한촌 앞을 흐르는 냇물 
    *챠우쉔화(朝鮮花):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에 핀 노오란 들국화를 현지인들이 애처로워 부른 이름
 

   
▲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1945. 11. 3), 뒷줄 ◯표한 이가 오희영 애국지사(사진제공 오희옥 여사)

  
오희영 (吳熙英, 1924.4.23 - 1969.2.17) 

오희영 애국지사가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액목현으로 이곳은 서로군정서 본부가 1920년 일제 토벌군을 피해 이동한 이래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한 곳이다. 아버지 오광선 장군이 활동하던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두 살 아래인 오희옥 애국지사도 태어났다.  

오 애국지사의 본가 고향은 용인으로 할아버지 오인수는 의병장 출신이고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이름이 성묵 ‘性黙’이었으나 조국의 광복을 찾겠다는 뜻으로 광선‘光鮮’으로 바꿀 만큼 혈기 넘치는 독립투사였다.  

또한 어머니 정현숙(일명, 鄭正山) 여사는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여 맹활동하였으며 오희영 애국지사의 남편 신송식 역시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어 서안(西安)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를 거쳐 오희영 자매와 사위까지 오씨 집안의 독립운동 내력은 그 자체가 역사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이다. 오희영 애국지사의 동생 오희옥 애국지사는 지금 수원에서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생존해 계신다. 2012년 현재 86살이다.  

오희영 애국지사는 중국 유주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가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오광심·김효숙 등과 함께 여군으로 입대하여 제3지대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 김학규 제3지대장의 인솔 아래 왜적의 점령지구를 돌파하여 오광심·이복영·신송식 등과 함께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부양(阜陽)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 전체가 그러했듯이 제3지대도 최종적으로는 국내에 진격하여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감행하기 위한 목표 아래 편의상 고국과 최단 거리 지점인 산동반도(山東半島)로 진출할 것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공작 기지를 부양(阜陽)에 설치하여 그곳에 본부를 두게 되었는데 이곳은 가장 위험한 적 점령 지구 근처였다. 부양은 사통팔달의 교통[육로·수로] 요충이었기 때문에 수시로 또는 기민하게 왜군 점령 지구 내에 대한 군인을 모으거나(초모)·선전·첩보 공작 활동은 물론 한·중 합작 게릴라전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었다. 

오희영 애국지사가 속한 제3 지대의 초기 공작 활동의 중점은 첫째, 적 점령 치하의 조선출신 애국 청년들을 모으고 둘째, 적 점령 지역 내에 광복군의 공작 거점을 구축 확보하면서 비밀 지하 조직망을 넓히고 셋째, 적 왜군의 군사 기밀을 탐지하며 필요에 따라 중국 유격대와 같이 왜적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는 데 두었다. 한마디로 적진 깊숙이에서 왜적과 맞섰던 것이다.  

1944년에는 부양(阜陽)에서 군사 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신송식(申松植) 교관의 인솔 아래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중경(重慶)으로 가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주석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면서 1944년 임시정부요인들이 거주하던 토교에서 한필동 목사의 주례로 독립운동가 신송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 뒤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다. 

“언니는 당시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습니다. 또 말도 청산유수였고 남자처럼 활달한 성격이었지요.” 동생 오희옥 애국지사를 얼마 전 찾아뵙고 우렁이 된장으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언니 오희영을 그렇게 기억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오희영 애국지사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서간도에 들꽃 피다》 2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