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3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항일독립운동

독립운동의 열정 제주교육으로 꽃피운 최정숙 애국지사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 때 나는 17살 소녀였다. 그날 나는 대한문 앞에서 큰 갓에 거적을 깔고 통곡하는 동포들 틈에 끼어 나라 없는 설움과 일인들에 대한 분노가 북 받혀 올라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날 대한문 앞에서 만세운동을 한 사실이 학교 측에 발각돼 다음날 직원실로 끌려갔다. 담임선생과 훈육 선생은 나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의자를 들고 서있도록 하는 엄한 벌을 주었다. 일인교사들은 펄쩍 뛰면서 이후 덕수궁 쪽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꾸짖었다. 내나라 임금이 돌아가셨는데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가련한 백성! 이날의 사건은 어린 나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다시없는 밑거름이 되었다. ” -제남일보, 최정숙 증언 ‘내가 걸어온 길’ 가운데서 1973.9.17 -

 1902년 제주 삼도리에서 태어난 최정숙 (崔貞淑,1902. 2.10 ~ 1977. 2.22)애국지사는 제주 신성여학교(현, 신성여자고등학교, 교장 남승택)를 1회로 졸업한 뒤 당시로는 쉽지 않은 서울 진명여학교로 유학을 왔다. 당시 제주도에서 서울유학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어린 정숙은 법조인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고 졸라 서울 유학의 꿈을 이뤘다. 진명여학교에 진학한 뒤 줄곧 1등을 맡았으며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시절 3.1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투옥 되었다.

   
▲ 최정숙 애국지사(왼쪽) 만세운동으로 잡혀가 받은 판결문 원본에는 최정숙 이름이 선명하다

 정숙이 형무소에 들어간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갑자기 어느 감방에서인가 ‘대한독립만세’ 를 외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도화선이 되어 형무소 안은 온통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가득차고 말았다. 이튿날 알고 보니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람은 유관순이었다” - 『수도자의 삶을 살다간 독립운동가 제주교육의 선구자 최정숙』 박재형 지음-

 3.1 만세운동으로 최정숙 애국지사는경에 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 신성여중고 초대 교장이던 시절 학생들과 직접 삽과 삼태기로 학교 운동장을 만들었다

 출옥 뒤에는 1925년 목포소화학원 교사를 시작으로 전주사립혜성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의료혜택을 못 받고 있는 것을 보고 1943년 41살의 만학으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1회로 졸업하게 된다. 의사가 된 뒤 고향 제주로 내려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극진하게 보살폈다.

   
▲ 최정숙 애국지사는 어려운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에 폐교된 모교인 신성여학교를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제주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해서도 신성여학교의 부활이 이뤄져야한다는 신념으로 지역유지를 쫓아다니며 설득하여 마침내 1946년 9월 신성여자중학원(중학교)을 열고 초대 교장이 되어 학생들과 손수 괭이 삽, 삼태기를 들고 학교 운동장을 만드는 등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여성교육에 힘써 이후 제주 신성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초대 제주도 교육감이 으로 제주 교육을 정상으로 이끄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최정숙 애국지사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에게는 양아드님이 한 분 계신다. 당시 제주농고 4학년이던 안흥찬(현재 85살) 군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양아들로 삼은 계기는 신성여학교 교장이 되어 날마다 이른 새벽 마당을 손수 쓸고 있을 때 안흥찬 학생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함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당 쓰는 일을 돕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수도자의 삶을 살다간 독립운동가 제주교육의 선구자 최정숙』에서 밝혀 놓았다.

그때 최정숙 교장 선생님은 부지런한 흥찬 소년을 보고 ‘이런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흥찬 학생을 아들로 삼게 되었다. 마침 흥찬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데다가 신교육을 받은 분이고 최정숙 교장선생님과 친분이 있어 흔쾌히 아들에게 최정숙 교장 선생님을 어머니처럼 모시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최정숙 애국지사의 아들로서 운명할 때 까지 함께 했다.

   
▲ 제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고 옛터 표지석

 며칠 전 제주 신성학교를 둘러보고 만나 뵌 며느님 김정희(81살)여사는 반갑게 글쓴이를 맞이하면서 어머님의 회상에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님은 3.1만세 운동 때 혹시 왜경에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면 시체라도 찾으라고 속치마에 이름 석 자를 써 두셨다고 했습니다. 서울 유학시절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당찬 분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최정숙 애국지사와의 소중한 인연인 여러 권의 앨범을 꺼내 보이시면서 제주여성의 선각자요 독립투사였던 어머니의 일생을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최정숙 애국지사가 독립 운동할 때 왜경에 잡혀 들어갔던 판결문 원본 등을 소중한 상자에서 꺼내 보여주셨다.

 제주신성여학교는 1900년 초 제주도에 여자교육기관이 전무함을 알고 안타까워하던 프랑스 출신 라크루신부(1871~1929)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9년 10월 18일 학교를 열었고 지난 2009년은 100주년 되는 해였다. 개교 당시에는 40여명의 학생들로 시작했던 학교가 2014년 현재 30학급에 학생 1,201명으로 성장했으며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제주를 대표하는 여성교육기관으로 교명(校名)처럼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독립운동가이자 초대교장인 최정숙 애국지사의 지대한 숨을 공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양윤 행정실장의 친절한 안내로 제주신성여자고등학교 교정을 둘러보고 교정 한쪽에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한 100주년 기념관을 보러 교정을 걸으면서 올려다 본 하늘은 한 겨울임에도 높은 가을 하늘처럼 맑고 푸르렀다. 100주년 기념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자한 모습의 최정숙 교장선생님 동상이 새겨져 있어 가슴이 뭉클했다.

   
▲ 제주의 명문 신성여자고등학교 (도남동 소재)

  국난의 시기에 태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은 적지 않다. 그러나 교육자로서 의사로서 더 나아가 독립투사로 일생을 걸어 헌신하신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최정숙 애국지사의 희고 순결한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면서 교정을 나오는데 방학임에도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여느 때보다 더 소중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