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훈춘에 곱게 핀 무궁화 꽃 ‘김숙경’
젖먹이 어린 핏덩이 밀치고
남편 간곳을 대라던 순사 놈들
끝내 다문 입
모진 고문으로도 열지 못했지
구류 열흘 만에 돌아온 집엔
엄마 찾다 숨진 아기
차디찬 주검 위로
차마 떠나지 못한 영혼
고추잠자리 되어 맴돌았지
활화산처럼 솟구치던 분노
두 주먹 불끈 쥐고
뛰어든 독립의 가시밭길
아들 딸 남편 모두
그 땅에 묻었어도
항일의 깃발 놓지 않던
마흔 네 해 삶
훈춘의 초가집 담장 위
한 송이 무궁화 꽃으로 피어났어라.
*이윤옥 시 - 훈춘에 곱게 핀 무궁화 꽃 김숙경-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김숙경 (金淑卿, 1886. 6.20 ~ 1930. 7.27)애국지사는 열한 살 나던 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웃집 소년 황병길에게 시집을 갔다. 두만 강변에 자리한 경원땅은 그 무렵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해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도탄 속에 빠진 조선인들이 살길을 찾아 중국 연변으로 이민 가는 길목이었다.
그 가운데는 풍전등화의 조국을 건지기 위해 구국의 뜻을 품은 애국지사들도 많았는데 남편 황병길은 어린 마음이지만 그들의 영향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자신도 예외의 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열한 살 어린 신부에게 늙은 시부모를 맡기고 독립운동에 뛰어 들게 된다.
1907년 김숙경 애국지사가 21살 되던 해였다. 남편 황병길이 연변과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며 그 명성이 높아지자 일제는 남편을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어 집으로 들이 닥친다. 그때 김숙경 애국지사는 해산한지 얼마 안 되는 몸인데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린 핏덩이를 놔둔 채 경찰서로 끌고 가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김숙경 애국지사가 남편의 소재를 알려 줄 리가 없었다.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자 구류 10일 만에 고문 상태로 풀어 주었지만 집에 돌아오니 갓난아기는 숨진 지 여러 날 되었다.
▲ 김숙경 황병길 부부 이야기가 나오는 <연변여성> 1991.10월호
이때부터 김숙경 애국지사는 남편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만주 훈춘(琿春)으로 옮겨 가 독립운동에 함께하게 된다. 남편 황병길은 여자도 배워야 한다면서 아내에게 조선글을 가르쳐 주어 배운지 얼마 안 돼 조선의 문서를 줄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때 김숙경 애국지사 집에는 이종휘, 안중근, 이범윤, 홍범도 같은 쟁쟁한 애국지사들이 드나들었던 참이라 그들의 불타는 독립정신을 자신도 모르게 몸에 익히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에서도 3월 13일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숙경 애국지사도 <한민회>에 가담하여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만세시위 이후에 김숙경 애국지사는 여성들의 독립투쟁을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그해 9월 20일 훈춘현에서 여성들의 항일조직인 <한민애국부인>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앞장섰다.
<한민애국부인회>는 어머니와 아내들이 자기의 아들이나 남편들을 독립군에 참가시키도록 독려했으며 열악한 경제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은반지와 머리카락 까지 잘라 의연금을 마련하여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훈춘에 300여명의 독립군이 조직되자 이들의 뒷바라지에 혼신을 쏟았는데 특히 부실한 식사를 개선하고자 돼지와 닭을 기르고 이역만리에서 김치를 담가 주는 등 독립군 식단에 신경을 썼다. 독립군이 입을 옷을 만들고 빨래 등을 도맡아 하면서 그들이 독립활동에 전념 할 수 있도록 몸이 부스러지도록 뛰었다.
한편으로 <한민애국부인회> 회원들은 마을마다 야학을 세워 조선의 역사와 민족혼을 가르쳤다. 김숙경 애국지사는 연설 실력이 뛰어나 그의 연설장에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1920년 4월 13일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던 남편이 35살로 순국하게 되는 불운을 만났고 자신도 그해 10월 만주의 조선인학살 사건인 ‘경신년대토벌’ 때 잡혀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보니 자신처럼 끌려온 조선인이 80여명이나 되었다.
왜경은 큼지막한 구덩이를 파고 잡혀온 이들을 그 앞에 세워 놓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여자들은 풀어 주라는 명령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으나 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었다. 이후 몸을 추슬러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다 1930년 7월 27일 급성위장염으로 만주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김숙경 애국지사는 4남매를 두었는데 둘째딸 황정신은 ‘연통라자항일유격대’에서 통신, 선전, 부녀 사업을 맡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혀를 빼물며 동료들을 보호하였으며 이후 또다시 체포될 위기에 이르자 스스로 벼랑에서 뛰어 내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연변에서는 천추에 이름을 남긴 여성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외아들 황정해는 14살에 ‘연통라자항일유격대’에서 아동단 단장으로 활약했으며 17살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전사로 뛰다가 23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김숙경 애국지사는 훈춘현 연통라자(煙筒笠子) 지역에서 살 때 황무지를 개간하여 힘겨운 생활을 하면서도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었다. 나라를 잃고 남의 땅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조국을 되찾으리라는 마음을 무궁화에 한껏 담아 44살 동안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한 김숙경 애국지사에게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더 자세한 것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4권 (2월 25일 발간 예정)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