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 청홍 조각보에 새긴 태극기 꿈 '노영재'
-
이윤옥 - 구순 나이 이르도록
- 청홍조각 잇댄
- 태극기 품에 안고
- 모진풍파 견뎌 온길
- 장강의 푸른 물 따라
- 떠돌던 수많은 나날
- 혀 깨물며
- 천지신명께 맹세한 건
- 오직 조국 광복의 꿈
- 멀고도 험한 가시밭 길
- 내딛는 걸음마다
- 태극의 괘 나침반 되어
- 기필코 이뤄낸
- 광복의 환희여
- 노영재 애국지사 (盧英哉, 1895. 7.10 ~ 1991.11.10)
-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던 고 김붕준 선생의 부인인 올해 93살인 노영재 여사가 오늘 공개한 이 대형 태극기는 가로 1m90cm에 세로1m50cm로 누렇게 퇴색되기는 했지만 명주바탕에 청홍의 태극과 괘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태극무늬와 괘는 물들인 것이 아니라 색깔 있는 천을 일일이 바느질로 꿰맨 것으로 당시 노여사가 밤을 새워 직접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노영재 애국지사 - 당시 93살이던 노영재 애국지사는 “이 태극기를 만들면 우리나라가 독립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만들었다. 이 태극기를 가보로 물려 후손들에게 독립정신 등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산 교과서로 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형 태극기를 일일이 한 땀 한 땀 힘겨운 바느질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바라던 노영재 애국지사의 마음이 찐하게 전해온다. 노영재 애국지사는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장을 지낸 김붕준 애국지사 부인으로 1921년 6월 26살 되던 해 중국 상해에서 밀파된 안내원을 따라 전 가족이 인천항에서 어선을 타고 상해로 망명했다.
- 앞날을 알 수 없는 고난의 길에는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회장인 김마리아도 함께 했다. 당시 김마리아 회장은 왜경에 잡혀 심한 고문을 받고 몸 상태가 안좋았는데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상해까지 함께 갔다. 먼저 가 있던 남편과 3년 만에 만났지만 임시정부 생활의 고단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이후 보따리를 싸야했던 임시정부는 상해, 항주, 진강, 장사,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 노영재 애국지사는 8·15광복을 맞아 환국 할 때까지 27년 간을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등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에 힘썼다.
또한 1941년 6월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1944년 3월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
▲ <노영재 애국지사가 손수 만든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5-2호 , 문화재청 제공> |
이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김붕준(金朋濬, 1888∼1950) 일가가 소장하고 있는 태극기 3점은 부인인 노영재가 1940년대를 전후하여 제작한 것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정부공보 제75호(대한민단 24년 8월 20일)에 게시된 태극기와 유사한 형태다.
특히 재봉틀 박음질 제작기법이나 제작구도를 볼 때 중경 임시정부 시절 제작된 김구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8호)와 비슷하여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사의 국가 표상적인 맥을 함께 할뿐 아니라 국기 변천사를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노영재 애국지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 4권에 나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