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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독립의 노래 ‘고수복’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독립의 노래 ‘고수복’

                                             이윤옥

 

노란봉 정기 받고 자란 몸

경성에 올라와

푸른 꿈 펴렸더니

가지에 푸른 순 돋기도 전

밑동 잘렸네

  

방적공장 다니면서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뜨거운 독립의 노래

목터져라 불렀어라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 당하지 않았다면

스물 둘 꽃다운 나이 접고

눈 감지 않았을 것을

  

고향집 동구 밖서

손 흔들던 어머니

귀한 딸 주검에

끝내 오열 터뜨렸네

 

   
▲ 어여쁜 처녀 고수복 애국지사의 수감당시 모습

고수복 (高壽福, 1911 ~ 1933. 7. 28)

 고수복 애국지사는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스무 살 되던 해인 1931년 9월 종방방직회사(鐘紡紡織會社) 경성제사공장(京城製絲工場) 직공으로 입사하였다.

1932년 1월 말 정길성, 김응룡 등과 협의하여 좌익노동조합준비회(左翼勞動組合準備會)를 결성하기 위해 경성부내 각 공장으로 분담 활동을 하였으며, 3월 하순 경성부 팔판동에 거주하는 강응진의 집에서 정길성, 김응룡, 권오경과 만나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단체인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준비위원회의 총책임자에 권오경, 조직부 책임에 정길성, 재정부 책임에 김응룡이 맡았고 고수복 애국지사는 선전부를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1932년 8월 중순 무렵 문태화, 공원회, 이만규 등이 중심이 되어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하였는데, 적위대는 그 하부에 5개의 조직체를 두고 지도, 통제하는 최고지도기관이었다. 고수복 애국지사는 1932년 9월 적위대 예하 기관 중의 하나인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의 선전부 책임자로 뛰다가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 뒤 10월 18일 적위대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던 고수복 외 9명은 동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33년 7월 19일 예심에 회부되어 조사를 받다가 병세가 악화되자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명분은 출옥이지만 일제는 심한 고문 끝에 병세가 악화되면 감옥 안에서 죽였다는 면피를 하기 위해 병보석이라는 이름으로 출옥시켰는데 출옥하고 열흘이 채 안 돼 숨을 거둔 것을 보면 얼마나 극심한 고문을 받았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수원의 잔 다르크 이선경 (李善卿, 1902. 5. 25 ~ 1921. 4. 21) 애국지사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이선경 애국지사는 구류 8달만인 1921년 4월 12일 석방되었으나 구금 당시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집으로 옮겨진 뒤 9일 만에 19살의 나이로 순국했는데 고수복 애국지사도 똑같은 경우다.

 한편 꿈 많은 스무 살 처녀 고수복이 고향인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경성으로 올라와 버스차장으로 일했다는 기록이 서대문형무소 수형자 기록에 남아 있다. 이 기록은 1932년 11월 12일치 수형자 기록으로 방직공장 입사 뒤의 일로 추정된다. 당시 수형자기록의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인데 이 무렵 잡혀간 독립운동가들의 대표적인 죄목이 ‘치안유지법위반’이다.

정부는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고향 함경도를 떠나 경성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을 거둔 고수복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수복 애국지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항일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 서간도에 들꽃 피다> 4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