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8 (수)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항일독립운동

병약한 몸 이끌고 독립의 노래 부른 ‘신의경’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병약한 몸 이끌고 독립의 노래 부른 ‘신의경’

                                        이윤옥

    

금지옥엽으로 기른 귀한 딸
왜경의 군홧발에 치어
학교 안에서 잡혀가던 날

담담히 수갑 차고 돌아서던
병약한 외동딸 다신 못보고
무더위 속 가슴 앓다

끝내 숨져간 어머니
쇠창살 속에서 오매불망 
그리던 어머니

영정으로 만나 
어머니 몫까지 독립의지 다지며
묵묵히 걸어온 고난의 길

천국의 어머니도 장하다
웃음 지으시겠지

 

   

대한애국부인회와 신의경(辛義敬, 1898. 2.21 ~ 1997.8.11) 애국지사

   
 ▲대구감옥소 동지들 1 김영순 2 황애덕 3 이혜경 4 신의경 5 장선희 6 이정숙 7 백신영 8 김마리아 9 유인경 (사진 연동교회 제공)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했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 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되 후퇴 할 수는 없다. 의식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해 그 이상(理想)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설립 취지 2조-

 애국부인회 간부들은 나라사랑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군자금을 마련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이내 일본경찰에 발각 되어 1919년 11월 28일(금) 오후 4시 애국부인회가 급습을 받게 된다. 당시 애국부인회는 정신여학교 안에 있었는데 일제는 무장경찰과 형사 10여명을 풀어 애국부인회 간부들을 잡아갔다.

 왜경에 잡혀가면서 이들은 3대 결의를 했다.

첫째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말자

둘째 회의 내용을 누설치 말자

셋째 어떠한 희생이라도 각오하고 책임은 간부들이 지자.

 이러한 굳은 각오를 지킴으로서 애국부인회의 전국적 규모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회원들이 잡혀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보고서에 따르면 검거된 애국부인회 회원은 세브란스 간호원 29명, 정신여학교 교원 11명, 동대문부인병원 간호원 13명, 기타 27명 총 80명에 달했다.

 신의경 애국지사는 일경에 검거되기 일주일 전에 어머니가 외동딸이 잡혀 갈 것을 염려하는 말에 “어머니 지금 우리는 세계열강에 독립을 호소하고 나라를 찾을 때입니다. 국민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만한 신념과 각오가 없었다면 신의경 애국지사가 애국부인회 간부가 될 리도 없을 터였다.

 당시 검거된 애국부인회 간부는 다음과 같다. 회장 김마리아(25살), 부회장 이혜경(29살), 총무부장 황에스더(25살), 서기 김영순(24살)· 신의경(21살), 재무부장 장선희23살), 적십자부장 이정숙(21살), 결사대장 백신영(30살)이었다.

 사건을 맡은 가와무라(河村靜水) 검사 놈은 “조선인이라도 일본의 신민(臣民)이 된 이상 일본의 기반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국적(國賊)이다. 이들의 소행을 보면 독립사상이 격렬하고 배일사상이 농후 한 것을 명료히 알 수 있으니 이러한 무리들에게는 일한 병합과 취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논할 필요도 없다. 이 사건은 패역무도한 역적 사건이니만큼 추상같은 형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면서 애국부인회 간부들에게 혹독한 구형을 가했다.

   
 ▲대구 감옥소에서 할머니, 어머니, 남동생에게 보낸 옥중서신 1920년 (사진 연동교회 제공)

 수감 중에 어머니 신마리아 여사 49살로 타계

 어릴 적부터 유달리 병치레가 잦던 외동딸 신의경이 애국부인회 일로 잡혀 들어가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특히 정신여학교 교감이던 어머니 신마리아 여사는 금지옥엽으로 키운 외동딸 신의경과 사랑하는 제자들이 당신이 보는 앞에서 잡혀가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뒤 신의경 애국지사가 대구감옥소에 수감 중이던 1921년 6월 24일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딸이 왜경에 포박당해 끌려가는 모습을 본 뒤 병을 얻어 1년 6개월 만에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외동딸 신의경 애국지사는 어머니의 죽음을 3개월 뒤 출소 날에 알고 실신하였다. 신의경 애국지사는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굳은 신앙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갔다. 그는 훗날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돌아보았다.

 “우리 어머니가 부유한 재산을 남겼더라면 다 방종 했을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우리들은 갖가지 시련을 감내 해야 했다.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자립심과 백절불굴의 정신이었다.”

 *신의경 애국지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도서출판 얼레빗 발간 '4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