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군자금 모아 광복 꽃피운 ‘한영신’
이윤옥
한 땀 한 땀 자수 놓아
수예품 만들며 다진 마음
은비녀 빼고 머리카락 잘라
독립의 꿈을 키우던 마음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여자들이 움직여야 산다
독려하며 앞장서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이여
임이 모은 군자금
독립의 밑거름 되어
고귀한 광복의 꽃으로
피어났어라
한영신(韓永信,1887. 7.22 ~ 1969.2.20)
평북 신의주사람으로 1919년 6월 평양에서 김용복· 김보원· 김신희 등 장로파 부인 신도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이 부인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결성된 애국부인회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는 한편 평안도일대의 장로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때 그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노파로 변장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장로파를 중심한 애국부인회 외에도 감리파를 중심으로 생겨난 애국부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양파의 여성조직들은 합동을 모색하여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통합하였는데, 이때 한영신 애국지사는 대한애국부인회 연합회 본부 부회장을 맡았다.
▲ 대한애국부인회 회원
대한애국부인회는 8백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20년 10월 이 모임이 왜경에 발각되어 잡혀들어 갔다. 그는 이 일로 1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공소했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오히려 6개월의 형량이 늘어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평양여자신학원(平壤女子神學院)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한편 전국기독교 부인전도회 회장을 맡아 전도사업을 벌였는데 일제의 탄압에 의해 회장직을 사임하였으며 이후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으로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더보기> 비밀결사대 대한애국부인회 회원을 검거하라
被告韓永信發起者トナリ大正八年六月下旬金寶源,金用福,金信喜外數名ヲ平壤章台峴ノ自宅ニ招キ先ツ朝鮮現下ノ民心及獨立運動ノ狀況ヲ說明シ今日ノ時勢ハ獨リ男子ノミニ獨立運動ヲ委スヘキニアラス婦人ナルカ故ニ拱手傍觀スルカ如キハ同胞義務ニ反スルノミナラス男子ニ對シ恥ツヘキナリ故ニ吾々婦人ハ愛國婦人會ヲ組織シ以テ朝鮮獨立ノ爲努力セサルヘカラスト激勵スルヤ一同之ニ贊成シ身命ヲ堵シテ奔走スヘキ旨ヲ誓ヒ韓永信ヲ會長ニ推シ列席者ヲ夫々役員ニ擧ケ同志叫合會費ノ徵收,軍資金ノ募集,排日思想ノ鼓吹,決死隊獨立團其他運動員ノ庇護援助等ニ關スル事項ヲ決議シ越ヘテ同年八月上旬被告金用福方ヘ韓永信外七名ノ重ナル幹部集合シ活動ノ經過役員ノ改選及監理派合同ノ可否ヲ密議シ聯合ノコトニ決定散會セリ |
1920년 11월 4일 조선총독부 경찰총장(朝鮮總督府警務總長)은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을 검거하였다. 당시에 한신영 애국지사도 무지막지한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러야 했는데 그들이 한신영 애국지사에게 덧씌운 죄목은 다음과 같다.
<번역>
피고 한영신 발기자는 대정 8년(1919) 6월 하순 김보원, 김용복, 김신희 외 다수를 평양 장대현에 있는 자택으로 불러 모아 조선의 민심동향 및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남자에게만 독립운동을 맡길 수 없다고 하면서 부인이라고 수수방관 하는 것은 동포의 의무에 반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이러한 일은 남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므로 부인들은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말에 동지들이 찬성하여 신명을 다해 뛸 것을 맹세하고 한영신을 회장으로 추천하였다. 참석한 부인들은 모두 동지 규합회비를 모아 군자금 모집, 배일사상, 결사대독립단 기타 운동원 보호, 원조 등에 관한 사항을 결의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상순 피고 김욕복 집으로 한영신 외 중책을 맡은 간부 7명이 집합하여 그간 활동의 경과보고와 임원 개선 및 감리파와 합동 여부를 비밀리에 연합하기로 결정하고 산회하였다.
*한영신 애국지사 외에 80여명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1-4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