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4 (토)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항일독립운동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한  ‘김조이’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한 ‘김조이’

 

                                                                              이윤옥

 

창원의 딸 푸른 꿈 안고
경성의 다락방에서  

헐벗고 무지한 여자들 불러 모아
환난 중인 조국을 일깨웠네  

비바람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이 독립의 그날까지 
여성이여 비굴치마라 

사자후 토해내며
독립투쟁 앞장선
불굴의 정신  

조국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하리 
 

김조이 (金祚伊, 1904. 7. 5 ~ 납북) 

   
▲ 김조이 애국지사의 서대문형무소 수감 사진(1935.1.17.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조이 애국지사는 1904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에서 아버지 김종태와 어머니 배기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사립학교인 '계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을 떠났는데 할아버지가 '300석지기'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19221월 고향에서 계광학교를 마치고 18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을 하던 중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에 가입해 1926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121일 서울에서 허정숙·주세죽·김필순·정봉·배혁수·박정덕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자청년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집행위원에 뽑혀 활동하였다.  

김조이 애국지사는 종로구 낙원동에 사무실을 연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여성노동자 위안 음악회 개최 등의 사업을 펼쳤고, 무산아동학원 설립, 여성을 위한 문고 설치, 학술강좌 개최 등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2월 김조이 애국지사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위원에 뽑혀 활동하다가, 4, ‘적기(赤旗) 시위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319월 하순 김조이 애국지사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지시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김복만과 함께 귀국,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이끌다가 19328월 일명 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함흥경찰서에 검거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공청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조이 애국지사는 이 사건으로 2년간 구금되었다가 기소되어 193412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미결구류 10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고, 1937920일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  

한편 김조이 애국지사는 죽산 조봉암과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원래 죽산은 강화 출신 김금옥과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두었다. 그러나 김금옥은 혼인 신고를 하지 못한 채 죽산이 상해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지병으로 1934년 숨졌다.  

김조이 애국지사는 해방 뒤 1945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인천대표로 참석했고, 12월 조선부녀총동맹에 가입하였다. 1946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부녀총동맹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뽑혔다. 그러나 19506·25 한국전쟁 이후 7월 중순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조이 애국지사가 관여한 <경성여자청년동맹>이란?  
 

   
▲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 1주년 기념식 기사(1926.1. 21. 시대일보)

1925121일에 창립한 사회주의 계열의 여자청년단체다. 발기인으로는 허정숙, 김조이, 주세죽, 김필순, 정봉, 배혁수, 박정덕 6명이었다. 당시에는 조선노동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이 결성되어 사회주의 운동이 최고조기에 접어들던 때였다. 강령은, 무산계급 여자청년의 투쟁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꾀함 무산계급 여자청년의 단결력과 상부상조의 조직력으로 여성의 해방을 기하고, 당면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등이었다. 그런데 강령 제2항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왜경에게 압수되었다.  

규약에 따르면 회원이 될 자격은 만16살 이상 만 26살 이하의 여성으로 제한하고, 일반 청년 여성에게 해방 의식을 각성하게 하는 수양 기관의 설치와, 출판·강연·강습·연구회 등을 자주 열 것을 사업 계획으로 삼았다.  

이들은 정면으로 계급투쟁의 혁명주의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의 결성으로 급격히 좌경화된 사회운동이 반영된 것이다.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이후 박원희, 김숙정 등이 결성한 경성여자청년회와 더불어 사회주의여성단체를 하나로 하여 1926년에 중앙여자청년동맹을 새로 발족시키게 된다. 

*김조이 애국지사를 비롯한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4권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