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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데라우치를 암살하라 '최중호 애국지사'

7월의 독립운동가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선열들은 가만히 좌시하지 않고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력을 양성하는 사람,  임시정부를 세워 나라의 뼈대를 만드는 사람, 자라나는 2세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 독립자금을 모으는 사람 등 각자의 위치에서 단 한치의 흐트럼 없이 우리 동포들은 뛰고 뛰었다. 친일파 매국노들을 빼고 우리 겨레는 합심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거기에는 남여가 따로 없고 늙은이나 어린이도 따로 없었다.

최중호 애국지사는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격인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 계획에 앞장서다 투옥되는 등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신 분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최중호(崔重鎬, 1891. 1. 20. ~ 1934. 3. 28)  애국지사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최중호 애국지사

선생은 1891년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양산학교(황해도 안악 소재)를 다니면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김구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1911년 선생은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테라우치(寺內)총독 암살음모사건(소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4년 서울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과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하였으며, 항일군사인재 양성을 위해 임시정부가 설립한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군자금 모집 및 외교활동을 위해 광동을 다녀왔으며, 박은식 선생과 함께 사민보(四民報) 발간에 참여하는 등 언론활동에도 종사하였다.

1924년 선생은 상해대한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어 교민들의 생활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교민단에서 경영하는 상해 인성학교 교사 및 학감으로 재직하면서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등의 단체를 결성하여 어려움에 처한 한인 동포나 임시정부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 상해 인성학교 학생과 교직원

1920년대 후반 선생은 독립운동 진영의 이념갈등을 해소하고자 한국유일당 상해촉성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9년 유일당촉성운동이 좌우세력의 인식 차이와 당시 중국의 국공분열의 영향을 받아 해체된 후 재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에는 독립운동자동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 경제후원회 기사

한편,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추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 요인 등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를 떠났다.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당한 고문과 옥고생활로 얻은 폐병이 악화되어 상해를 떠나지 못하고 1934년 3월 28일 영면하였다. 1977년 정부는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

   
▲ 평양 대성학교


○1911년 데라우치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9개월 옥고
○1921년 한자신문 '사민보'의 편집 활동 전념
○1924년 상해교민단 의원, 인성학교 교사, 1926년 교장
○1926년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가, 군자금 모집 활동
○1929년 재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 조직

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