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원식 선생( 1877~1919 )은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 출생하여 대한제국 서울시위대 제1대대 서소문병영에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충남 등 각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신교육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함성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수원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시작된 이후 3월 26일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기로 조직적이고 격렬해졌다. 송산면 만세시위 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발포한 순사부장 노구찌가 군중들에 의해 처단되었고 격렬한 시위는 3월 31일 발안장터로 이어졌다.
홍원식 선생과 안종후, 김성렬, 이정근 등이 주도한 발안장터의 1,000여 시위군중이 일본인 상점 등을 상대로 거센 투석전을 벌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의 무자비한 발포와 탄압으로 이정근이 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는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3일에는 발안만세운동과 연계한 우정, 장안면의 대규모 연합만세운동이 전개되어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대부분의 시위 주동자들이 검거되었으나 발안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동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4월13일 13명의 보병을 이끌고 발안에 도착한 육군보병 아리타 중위가 제암리 진압을 시작하였다. 4월 15일 아리타는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하여 주민 약 20여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때 홍원식 선생은 주민들과 함께 교회에 들어갔다. 아리타는 주민들을 교회안에 가둬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불을 지르고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제암교회는 총성과 함께 불타오르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당시 홍원식 선생은 주민 20여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뒤늦게 현장에 달려온 선생의 부인 김씨도 일본군의 총격에 순국하였다. 제암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며 발안장터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홍원식 부부는 순국한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홍원식 선생을 201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공훈>
*대한제국 군인으로 군대 해산 후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일본군에 대항
*3.1운동 당시 발안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제암리 학살 만행으로 순국
<자료 :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