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우재룡 [1884~1955]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단양우씨 채희와 진주강씨의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문인적 소양보다는 무인적 성향이 강했는데 이는 부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2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는 1907년까지 5년간 근무 하던 중 정용기 산남의진 의병장을 만나 큰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훈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일본군과의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체포되어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 우재룡 선생
1915년 7월 15일(음),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ㆍ폭동ㆍ암살ㆍ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을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9월에는 군자금 7천여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쳐 1920년 1월 광복단결사대(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착수, 1920년 6월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7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광복이 되면서 광복회를 재건해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정신을 되살려 건국사업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광복회와 주비단에서 활동했던 생존지사들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1일 서울 견지정 111번지에서 광복회를 재건했다. 광복회의 재건 목적은 신국가건설에 동참해 민중의 발전과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것이었다. 광복회의 재건목적은 회칙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본회는 국권광복(國權光復)에 희생(犧牲)된 선배제현(先輩諸賢)의 의열을 추앙경모(推仰敬慕)하는 동시에 초주의적정의정도(超主義的正義政道)에 의(依)제하야 신국가건설제시책에 적극협력하며 영구한 민중의 발전과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함.
재건광복회는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광복회원들의 희생과 정신을 바탕으로 조직되었고, 해방 정국에서 광복회 정신을 계승해 신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재건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총무를 맡아 광복회 재건을 주도했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동생인 박하진(朴河鎭)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재건된 광복회는 서울에 본부를 설치하고 천안과 전라도에 지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대한문관학교설립에도 참여했다. 선생은 12월 임원진 개편에서 부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실질적인 재건광복회 책임을 맡게 되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선양사업도 실시했다. 광복회는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했고 많은 희생을 치룬 대표적인 단체였다. 때문에 독립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현장이 재건된 광복회의 가장 실질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재건 광복회는 1946년 2월 15일 경북 입암에서 고산남의진순절제공위령제(故山南義陣殉節者諸公慰靈祭)를 거행했다.
이는 광복회 재건을 주도한 선생이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선생은 산남의진 출신이었고, 선생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정용기의 순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건광복회는 1946년 3월을 기점으로 해소됨으로써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선생은 1955년 3월 3일(음) 대구에서 서거하셨고, 1967년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09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